지난 2010년 11월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할 수 있느냐?”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41%만 신뢰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중 17.6%만 매우 신뢰한다고 대답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이 설문에 참여한 기독교인을 파악해 보았더니 18.3% 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기독교를 매우 신뢰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10여년전 조사한 한국교회의 현주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신뢰할만한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교회는 신뢰를 잃어만 가고 있을까요? 이 설문조사에서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15.6%가 교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김두식이라는 작가가 쓴 “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에 교회”라는 책에 있는 내용 일부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청년이 잘 믿는 여성을 만나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중직자인 청년의 어머니는 “혼수나 예단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런 것 원하는 집 아닙니다”하고 고상하게 말합니다. 여자 쪽에서는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으나 막상 결혼식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시어머니 될 분이 “신부쪽이 우리를 무시한다”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뒤늦게 신부 집에 비상이 걸리고 혼수를 준비하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 것은 있어서 머리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몸이 원하는 대로 말하면 정직하고 편한데 수십년간 교회 다니며 배운 것이 있는지라 그렇게는 못하고, 그러다 보니 갈수록 말과 행동의 괴리가 커집니다. 세상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괸히 남들과 다른척 하려다 보니 더 나쁜 평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김두식교수가 쓴 이 책에서 소개한 내용은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왜 이렇게 다를까요? 수 없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는 아는데 삶으로 투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말씀을 왜 투영하지 못할까요? 말씀을 내면화 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머리에서 내려와 손과 발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삶으로 실천되어야 말과 행동이 점점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십계명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말씀을 마음에 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지침서 입니다. 이 지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른 성경은 1500년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의 손을 빌려서 기록하지만 십계명 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십니다.
출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신명기9: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두 돌판에 기록한 것이 바로 십계명 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4장까지 –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합니다.
5장~10장 까지는 –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크게 두부분으로 나눈다하고 해서 하나의 돌판은 1~4장까지, 또하나의 돌판에는 5~6장까지를 기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두 돌판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하나님사랑하는 방법, 이웃사랑하는 방법이 나뉘어 쓰여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두 돌판으로 쓰여진 이유는 고대국가가 서로 조약을 맺는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두 개의 국가가 전쟁을 합니다. 당연히 한 국가는 승리하고 한 국가는 패배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면 패배한 국가는 승전국에게 항복을 합니다. 그러면 승전국과 패전국이 전쟁을 끝내면서 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을 “종주권조약”이라고 합니다.
이 종주권 조약의 내용은 패전국이 승리한 국가를 왕의 나라로 받들어 섬기고, 신하의 도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승전국은 뭐할까요? 왕의 나라가 되었으니까 신하의 나라를 앞으로 잘 다스리겠다고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때 같은 내용의 조약을 2개 적어서 하나는 승전국이, 또 하나는 패전국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집을 계약할 때 계약서를 두 개 써서 하나는 세입자가, 하나는 주인이 가져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두 개의 돌판으로 십계명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돌판으로 십계명을 썼다는 것은 십계명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이 어떤 조약을 맺는다는 것입니까? 종주권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종주권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 조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며 신하된 도리로 왕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을 두 돌판으로 쓴 이유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언제 이스라엘이 받습니까? 출애굽한 이후에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를 건넙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을 고린도전서 10: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는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구원 받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고백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어디를 향합니까? 시내산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 종주권계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종주권계약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주어진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0장2절입니다.
이것은 종주권계약인 십계명의 대전제입니다.
“나는 너를 에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대 전제라는 것은 십계명의 모든 말씀을 이것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앞으로 보게 될 십계명 앞에는 20:2절의 내용이 항상 붙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에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 우상숭배 하지 말아라
“나는 너를 에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경은 그냥 십계명을 주면 되지 이 말씀을 대 전제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종주권계약을 지킬 수 있는 힘이 과거 이스라엘이 에굽의 노예였다는 것을 기억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종주권계약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가면 이스라엘이 느끼는 감정이 어떨까요? 광야에서 느낄 수 없었떤 수 많은 달콤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에굽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자유를 만끽 했을 것입니다. 달콤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을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릴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면서 자신들이 노예였다는 사실도 잊어 버립니다. 종주권계약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백성의 도리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나안땅에 있는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바벨론으로 끌려 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7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신약에가서 이스라엘 백성은 또 자신들이 종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로마에게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전세계로 흩어져 버리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비극을 알게된 현대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노예였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부던히 노력합니다. 1967년 5월에 이스라엘에 6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때 군사력이 이스라엘 250만명, 아랍연합군 1억명 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아랍 연합군이 이기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이스라엘이 6일만에 이겨버립니다. 어떻게 이겼는지 봤더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떤 유대인들이 전쟁이 가까워 지자 죽음을 무릎쓰고 고국으로 돌아와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들이 왜 고국으로 돌아와 죽음을 불사하고 전쟁에 참여 했을까요?
이들이 노예였다는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지면 또다시 에굽의 노예였던 것처럼, 바벨론의 노예였던 것처럼, 로마의 노예였던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니 6일만에 전쟁을 끝내 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이 우리가 종 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때 종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노예가 될 위협앞에서 비굴하게 살지 않고 용감하게 하나님만 믿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에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씀을 기억해야 십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해야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세기 중엽까지 로마에서 기독교 신앙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당시 유세비우스 라는 역사학자가 젊은집사 “상투스”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잡혀온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젊은 지사는 재판 과정에서 “너는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한마디로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생명이 경각이 달린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 집사는 로마 관리 앞에서 이 짧은 대답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고소한 사람들은 신앙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며 압박했지만 그의 대답은 같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 집사가 변절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원형경기장에서 공개 처형을 시켰다. 처형되는 날에도 뜨겁게 달궈진 쇠의자에 결박한 후에 그를 고문하면 결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적대자들은 기대했으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의 고백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 세상은 진짜를 요구 합니다. 하나님도 진짜를 찾으십니다. 어쩌면 저를 포함해서 수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각오도 하지 않고,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지불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상투스집사처럼 진짜 그리스도인이 어떤지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게다”는 충성된 고백을 하는 사람의 호칭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은 예전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에게 주는 고귀한 호칭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 이다 라는 이말은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누군가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고백을 위해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 죄의 노예였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동시에 예수님의 노예가 되어 예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것을 기억할 때 그제서야 우리는 다음주부터 다루게 될 십계명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십계명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한번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어느날 길을 가고 있는데 젊은 청년 커플아 막 싸우고 있는 겁니다. 순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내용을 들어 봤습니다. 싸우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커플이 손을 붙잡고 데이트를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들 앞에서 누가 봐도 눈이 부실만한 매력적인 자매가 찐한 향수냄새를 진동케하며 그들앞을 지난간 겁니다. 그러면 이 형제가 그런가부다 하고 교제하는 자매에게 집중하면 좋은데, 이 형제가 볼때 지나가는 자매가 너무 매력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만 자기도 모르게 그 자매가 지나가는 흐름에 따라 눈과 고개를 돌린겁니다. 그런데 지금 옆에 누가 있습니까?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이 여자친구가 그 순간 기분이 너무 나빠진겁니다. 그래서 손을 뿌리치고는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여자를 그렇게 쳐다 볼 수 있어?”
“어떻게 내 손을 붙잡고 다른여자에게 집중할 수 있어?”
이런 자매의 반응에 형제가 얘기합니다. 별것도 아닌데 왜그래?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 자매가 뭐라고 할까요? 그럴거면 저여자 만나! 이러면서 또 얘기합니다.
“어떻게 내가 앞에 있는데 다른여자를 슬쩍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드러내놓고 쳐다 볼 수 있어?”
여러분, 이런일이 남녀 사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커플이 이렇게 싸운 이유는 둘만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커플이 아니고 그냥 친구라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커플로 사귀면서 특별한 관계가 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때 관계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자와 여자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으로 믿는 우리는 신부로 아주 특별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가 바로 십계명입니다. 결혼을 해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듯 남편인 하나님과 아내인 믿음이 사람과의 혼인신고서가 십계명인것입니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한 이후 부부관계가 원만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남편은 남편의 역할을 하고 아내는 아내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 주는 의미입니다. 지난주에 종주권조약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남편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아내의 역할을 해야 하는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아름다운 부부가 되듯, 하나님앞에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우리는 아름답고 복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되면 꼭 질투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듯이 사단은 하나님앞에서 아름답고 복된 삶을 방해 합니다. 왜 방해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면 마귀의 나라가 꺽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냐하면 하나님 아닌 다른것이 자꾸 눈에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자꾸 좋아지게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선악과가 먹음직하지도 않았고, 보암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어느순간부터 마음속에서 미혹하니까 따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자꾸 좋아지는 겁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이 금하신것을 먹습니다. 그로인해서 사람들이 천국을 잃어버리고 죄와 고통과 고난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인간의 연약함을 사단만 아는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너무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사람을 전적인 사랑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사람이 두 번 다시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가 복된 삶을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이 복된 삶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 첫 계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을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싸운 젊은 커플이 왜 싸웠습니까? 형제가 자매앞에서 다른곳에 시선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시선이 돌아가면 관계가 멀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에도 마음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십계명을 받기전 이스라엘 백성은 에굽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세우십니다. 모세가 에굽의 바로왕에게 이스라엘을 풀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왕은 계속 거절합니다.
에굽에 있어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입니다. 에굽의 바로왕은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에굽의 바로왕은 살아있는 신 인겁니다. 신이 인간 모세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풀어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절대 권력자요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했던 바로의 거절앞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십니까? 10가지 재앙을 에굽에 내리게 됩니다.
10가지 재앙에 등장한 “나일강, 개구리, 이, 파리” 이 모든 것은 에굽이 당시 섬겼던 신들입니다. 애굽은 나일강을 믿었고, 개구리를 섬겼고, 이를 섬긴겁니다. 이런 에굽이 섬겼던 신들이 에굽에 해를 끼친것이 10가지 재앙입니다. 에굽이 섬겼던 신들은 에굽에게 너무 무능한 모습을 보입니다. 왜 에굽의 신들이 이렇게 무능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에굽이 섬겼던 신들은 모두 그저 피조물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존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 진것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 부모님에 의해 태어납니다. 이슬람의 마호메트 역시 부모님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정녀로 태어나십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은 예수님이 참된 신인 하나님임을 가장 잘 들어내는 대목입니다. 그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신도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스스로있는분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철저히 굴복시킨 사건이 10가지 재앙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것을 믿고 있는 것 얼마나 바보같은 짓입니까? 이 바보같은 짓 때문에 행복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삶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도 다른 신을 두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만들어진 신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밑에서 황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 황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는데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밑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세와 모세가 믿는 하나님 믿고 에굽에서 나왔는데 덜걱 겁이 난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그래서 만든게 황금송아지입니다. 두려움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두려움과 걱정속에서 살아갑니다. 돈에 대한걱정, 건강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도와 주길 바랍니다. 그 바라는 마음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과 걱정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우상은 누가 만드는 것입니까?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상을 사람이 만들어 놓고 어느 순간에 사람이 만든것에 지배를 당해 버립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오늘날 우상숭배는 옛날터럼 신상을 섬기거나 절을 하지는 않습니다. 진짜 위험한 것은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오늘날의 우상이 어느 순간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보이지 않는 우상으로 자리잡은 대부분은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베가본드”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한 사건으로 시작 됩니다.
어느날 한국에서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폭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비행기 폭발은 테러 였습니다. 테러에 가담한 사람이 놀랍게도 대한민국의 정부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무까지 연결되어 테러를 하고 비행기를 폭발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돈 때문 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권력을 쥐려 할까요? 돈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인기를 끌려고 할까요? 돈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우상들이 돈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돈은 현대판 금송아지입니다.
성경은 유일하게 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
이스라엘이 에굽에서 탈출해 후에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서 우상숭배를 합니다. 가나안에서 섬긴 우상의 이름이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로써 남편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하고, 종주권조약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된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기에 농사의 기술자들입니다. 그럼 가나안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농사지으면 누가 더 많은 소출을 거둘까요? 당연히 가나안 사람이 더 많이 거둬 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 사람에게 가서 소출이 많은 이유를 물어 봅니다. 그러자 가나안 사람이 바알과 아세라가 복을 주어서 소출이 많아 졌다고 말합니다. 남들만큼 잘먹고 잘 살기위해, 남보다 조금 더 낳은 형편을 위해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기로 합니다. 그럼녀서 자연스럽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린게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믿는 다고 하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돈의 신입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왜 바알과 아세라를 받아 들였습니까? 바알과 아세라가 엄청난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현실때문입니다.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버린게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현실 때문에 돈이라는 우상을 두고 그것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형태를 음행이라는 단어로 표기합니다.
음행 = 히 :자나 -> 몸을 파는 창기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창기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아라! 내 앞에서 돈을 겸하여 섬기지 말아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은 순결한 신부가 되길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조금 더 실제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십일조 하십니까? 하시는데 온전하게 하고 계십니까? 십일조는 돈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은 돈에대해 이런말을 합니다.
젊은 사람은 돈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더 나이를 먹으면 돈이 전부가 아리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전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돈 때문에 사회나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불의 앞에서 아무말을 하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불의를 보고 못 본체 합니다. 돈 때문에 보고도 못 봤다 합니다. 돈 때문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앞에선 자의 모습인것을 시편 115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서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3~8)
내가 정말 하나님앞에 어떤 신도 두지 않고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려면 이 질문을 스스로 해 보시면 됩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삶에 하나님 없는 것이 두렵다면 하나님 잘 믿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 삶에 돈이 없는 것이 두렵다. 그럼 돈을 믿고 계십니다.
내 삶에 일이 없는 것이 두렵다면 일을 믿고 계십니다.
내 삶에 친구가 없는 것이 두렵다면 친구를 믿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앞에 신앙의 정절을 지켜 다른신을 두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중 2시탈출 컬투쇼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일상의 삶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사연으로 보내면 소개하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그 중 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사람이 동네의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요?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하는 겁니다. 산을 내려가서 화장실에게 가기에는 어정쩡한 거리였습니다. 이 남자는 참고 갈지 내려갈지 고민하다 사람들이 별로 지나가지 않자 등산로 옆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얼른 일을 보게 됩니다.
일을 보고 대충 뒤처리를 하고 계속해서 산을 오르려고 하는데 자신이 저질로 놓은 물건을 그냥 두고 가기가 그런겁니다. 두변을 둘러 보니까 돌들이 많은 겁니다. 얼른 그 돌들을 주워서 배설물을 돌로 덮었습니다. 잠시후 배설물은 없어지고 작은 돌무덤만 하나 생기게 된 것입니다. 흐믓한 마음에 등산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남자는 이 산을 다시 오르게 되었습니다. 얼마쯤을 올라갔을 까요? 사람들이 산은 올라가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궁굼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 간 남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전에 자신이 일을 보고 쌓아 놓은 돌무덤이 어느새 커다란 돌 탑이 되었고, 그 돌탑을 향하여 사람들이 공손히 두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 재미 없게 이야기 해서 별로 웃기진 않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한 바램이 있으면 자신이 똥을 향해 빌고 있는줄도 모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간절한 바램은 똥도 우상으로 만들 수 있구나.
오늘 우리가 다룰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우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해서 형상물로 만들어내는 것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걱정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나혼자산다에서 출연했던 방송인 이지웅씨가 암에 걸렸다 회복이 된후 인터뷰를 한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이지웅씨가 암이 걸리기 전에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보험을 하나도 들어 놓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덜컥 암에 걸리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 때 이지웅씨가 이런 말을 합니다. 빈털터리 되었다. 그러면서 이지웅씨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보험은 꼭 들어놔야 한다
사람들이 보험을 왜 들까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그 두려움을 줄여 보려고 드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머니들이 달밤에 정안수를 떠놓고 자녀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빌었습니다. 왜 빌었을까요?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걱정과 두려움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는데 꾀 오랜시간이 지납니다. 도저히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은 에굽에서 탈출할 때 오직 모세만 바라보고 왔는데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때 모세의 형 아론이 생각하기를 모세가 섬기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만들면 백성들이 두려워 하지 않을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에게 금붙이를 모으게 하고는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출애굽기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것은 지금 누구를 만든 겁니까? 다른 신을 만든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든겁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우상을 만들어 낸겁니다.
여러분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안믿는자에게 주어진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스라엘, 이시대에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009년도에 필리핀 세부를 처음 가봤습니다. 그때 저를 가이드 해 주었던 사람이 세부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던 후배목사 였습니다. 이 친구가 저를 세부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한 성당을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 성당의 이름은 “산토리노”라는 이름의 성당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굉장히 유명한 성당이어서 평일이었는데도 사람들이 많이 왕래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눈에 들어 왔던 것은 사람들이 곳곳에 맨땅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가만 봤더니 이들이 성화를 향해서 경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려진 성화, 마리아가 그려진 성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려진 성화를 보면서 무릎꿇고 경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 성당을 다니시는 분들에게도 있습니다. 마리아상을 향하여 손을 모아 기도하고, 예수 상을 향하여 손을 모아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 그것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하나님이라 마음에 생각하고 경배합니다. 성화를 향하고, 성상을 향해 사람들이 신앙의 행위로 무릎꿇고 손모아 경배하는 모습과 너무다 똑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은 우상을 만드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우상을 외 찾고 섬기는지 봤더니
둘째, 탐욕 때문입니다.
오늘 20장4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은 누구를 위해 만드는 것입니까? 섬기는 사람을 위해 만드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들이 소망하것을 이루기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나 중심으로 내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갖가지 형상들을 만듭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을 섬기기도합니다. 땅에 있는 짐승, 나무, 돌을 섬기기도 합니다. 물속에 용왕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만들어 섬기면서 자신들의 두려움을 해결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탐욕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상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서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시115:3~7)
우상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 완전히 반대되는 시편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94편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창조물에 담으려는 행동. 이것이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물에 담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단 뒤에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의미 부여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창조물에 갖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 하심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우상을 섬기는 모양이라도 갖추면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오늘 본문은 “질투”를 하신다고 말씀 합니다.
질투 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듭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저의 아내가 낮선 남자와 굉장히 다정하게 팔장을 끼고 가는 겁니다. 누가 봐도 이건 연인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쿨하니까 아무렇지 않아! 이게 아내를 사랑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런 아내를 보고 화가 나면서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겁니까? 질투 심이 사로 잡히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우상을 섬기면 이런 질투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십계명은 결혼서약서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믿는 자는 결혼한 관계입니다. 부인인 믿는자가 우상인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으면 하나님이 쿨하게 넘어가는게 정상입니까? 화를 내면서 질투하는게 정상입니까? 거짓없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라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을 빼앗기면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 십계명을 몸에 새기며 지켜내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왜 믿습니까? 많은 사람이 천국가위해 믿습니다. 틀린것은 아니지만 조금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사랑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천국을 보장 받는 거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목적이면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결국 천국도 잃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축복을 주십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 자손 천대 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반대로 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어떤 저주를 내리십니까? 삼대 까지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 큰 죄를 저질렀을 때 삼대를 멸하여 그 씨를 말려버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의도로 삼대를 저주할까요? 이것은 숫자적인 삼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천대와 대비되는 삼대를 의미합니다.
삼대에 비해 천대 얼마나 큽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고 벌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주시고 은헤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깊은 사랑을 나누며 좋은 것을 채워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십계명의 두 번째로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원수집안의 아들과 딸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가 서로를 보고 한순간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서로가 원수의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 마음이 아파합니다.
이 마음아픈 상태를 줄리엣이 로미오와의 대화중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미오, 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 인가요?
당신의 아버지와 이름을 부인하세요. 그러면 제가 캐퓰릿 이름을 버릴 테니까요.
당신이 몬태규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마찬가지일테니
몬태규가 뭐지? 손도 아니고.... 발도, 팔도, 얼굴도 아닌데.....
다른 신체부위도 아니고, 오, 제발 다른이름을 가져요.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도 이름이 로미오가 아니더라도.....
이름과는 상관이 없이 사랑스런 완벽함을 간직할거야.
로미오, 그대의 이름을 버려요.....
당신의 일부가 아닌 그 이름 대신 내 모든 것을 받으세요.
원수 가문의 이름 때문에 사랑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만날 수 없었을까요? 이름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고원영 이라는 이름 안에는 목사라는 의미도, 두 아이의 아빠라는 의미도, 전라도 시골에서 자랐다는 의미도, 누구의 자녀인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십계명3번째 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름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에서 여호와 라는 단어를 처음 쓸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부르셨을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모세가 장인어른의 양떼를 돌보다가 호렙산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너무 신기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떨기나무가 불이 붙었는데 타지를 않는 겁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번개에 맞아서 가끔 불이 붙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불이 붙으면 이 나무는 워낙 말라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타서 없어지는게 특징입니다. 그런데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으니 얼마나 신기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나무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으라”
그러더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굽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네가 그들을 구원하라는 겁니다. 모세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보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모세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말해 줍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
여러분 정말 참된 신이라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유교는 조상을 신을 섬깁니다. 명절에 상을 차려놓고 밥에 숟가락을
꽃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새해에는 우리 가족좀 잘 살펴 주세요.
그런데 그 조상도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터 태어나셨습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교만 그런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어머니와 아버지로 부터 태어납니다.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어머니와 아버지로 부터 태어납니다.
오늘날 스스로 하나님 이라고 말하는 신천지의 이만히와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씨도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태어 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로 부터 태어난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참된 신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사랑의 결과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참된 신이기에 이렇게 말한겁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을 히브리어 문장을 그대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에흐예 아셰르 예흐예
“에흐예”라는 단어에서 “야훼” - 여호와 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 “에흐예”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문법상 1인칭 미완료형입니다. 무슨말이냐하면 이 단어는 과거, 현제, 미래를 모두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번역에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라는 번역은 다양하게 번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 했던 자이다.
나는 헌재 존재하는 자이다.
나는 미래에도 존재하는 자이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 동시에 존재하는자 이다. 이런 번역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든 시간안에, 모든공간안에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을 들어내는 이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어떨때 사람들이 사용하냐하면 “구원”에 관련될때 상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병들었을때 어떤 하나님을 찾습니까? 여호와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가 평이 필요할 때 어떤 하나님을 찾습니까? 여호와샬롬 평화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승리가 필요할 때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구원과 관련될때 항상 따라오는 단어는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분이 여호와 라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름의 의미 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합니다.
"망령되다"-> 히브리어 : 샤웨
->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근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의 행보에 긍정하는 분들도 계시고 부정하는 분도 계십니다.
저는 이분의 행보 자체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분이 한 말씀중에
언론에 소개된 말은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사에 소개된 그분의 말을 그대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내게 임했기에 대한민국이 망할 것을 미리 본 것이다. 그래서 국민에게 문재인대통령 퇴진을 선포한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사모하라. 기름부음이 100%임하면 문제인 저거 나오게 되 있다. 우리가 끌고 나올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아마 심장마비로 데려갈 것이다."
여러분 성령의 기름부음은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킬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고 비방하는데 하나님, 성령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망령되이 부르는 일 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우리 기독교를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개독교 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기독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컸는 사람들로 인해 기도교가 개독교라 불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스스로가 만든 자화상 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을 기억하십니까?
주기도문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어떻게 거룩해 질까요?
저는 축구를 참 좋아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축구간판 스타를 꼽으라 하면 바로 손흥민선수 입니다.
이 손흥민 선수는 아버지 손웅정씨가 키워낸 작품입니다.
손웅정씨가 세계적인 선수로 손흥민 선수를 키운것을 보고
손흥민 선수가 속해있는 토트넘이라는 축구팀에서 손웅정씨를 코치로 데려오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손흥민 선수같은 훌륭한 선수가 나오는 것은
손웅정이라는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아본것입니다.
누구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 졌습니까? 아들 때문이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어떻게 거룩해질까요? 자녀된 우리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자녀된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불려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일을 했던 서기관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기록할 때 잠시 펜을 놓고
목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한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두번 기록되면 두번 목욕을, 세번
이름이 거론되면 세번 목욕을 하고 그 이름을 적었습니다. 왜 이들이 이런 수고를 했을까요?
이름 자체를 쓸때 순간적인 행동조차도 혹시 망령되이 쓰지 않기 위한 노력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에 대해 표현할 때 "하늘"이라는 단어로 대체 합니다.
원래는 하나님나라 라는 단어로 천국을 표현해야 하는데 마태복음은 "하늘나라"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하늘이라는 단어로 대신 쓰여진 것입니다.
왜 단어를 바꾸어 썼을까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부르는 것 자체로 혹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지 않을까 조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여호와!
구원의 이름입니다. 모든것을 구원하고 회복할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2006년도에 서해대교에서 29중 추돌 사고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 말로 엄청난 참사 였습니다. 이 참사가 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달리던 길이기에 안개가 있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안전거리를 두지 않고 운전을 하다 그만 29중 추돌이나 나게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익숙한 길에서도 엄청난 사고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 가지입니다. 익숙한 종교생활이라고 할지라도 안개처럼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은 금방 위기에 닥치고 흔들립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길이 보이고 선명하면 신앙생활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개속에서 운전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겠습니까? 선명한 길 위에서 운전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겠습니까?
선명한 진리의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선명한 신앙의 기준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나타난 다양한 주제들을 하나 하나 정립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중의 하나가 가르치는 것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명한 기준을 새워가길 원하신 것입니다.
수 많은 성경의 주제들 중 오늘 말씀을 통해 안식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으려 합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언제 입니까?
전통 이스라엘백성은 안식일을 금요일저녁부터 토요일저녁까지 지킵니다. 저녁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나는 이유는 이스라엘 세계관에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창조이야기를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첫째날이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저녁이 하루의 시작인 겁니다. 어찌 되었든간에 전통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은 토요일을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성도들이 주일을 안식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이 안식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하는 것은 안식일 이기 때문에 주일에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하는 이유는 이날이 안식일 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한 날 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부활한 날을 기념해서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이 어떤 날 입니까? 죽음을 극복한 날입니다. 부활은 안식 후 첫날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일요일에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 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로 이 부활 한 날을 기념해서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은 아닌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빠진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 기독교의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너무 얘민하게 반응하면서, 주일에 일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주일에 돈을 소비하는 것을 정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열심을 갖는 것은 너무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은 막연하게 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열심을 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막연하게 일하면 안되고 예배만 드려야 한다는 것은 십계명의 4계명으로 안식을 재정한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십계명으로 재정한 안식일을 지키라는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그러므로 나 혀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의 참의미를 이해하기위해는 처음 안식이 있었던 창세기를 이해 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 하신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일하지 않고 안식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개념 때문에 아무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7일 이후 8일, 9일, 10일 째 되는날에는 무엇을 했을까요? 창조 이후 하나님은 7일째도, 8일째도, 9일째도 그냥 쭉 안식 하셨습니다.
우리가 새고 있는 일주일인 7일 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임의로 구분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엄청나게 문명이 발달했던 바벨로니아에서 일주일을 7일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니 창세기 기준의 안식일은 사실 7일 이후의 모든 날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은 사실 우리 인간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 하실 때 인간은 이 안식일에 뭐 하고 있었을까요?
에덴동산에서 죄도, 흠도 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에덴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동안 인간은 천국을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천국을 사는 것이 인간 입장에서의 안식 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6일 창조이후 모든날 하나님과 교제하며 천국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천국이었것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가 어느 한 날만 모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 쓰여진 구절은 창세기2장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 - 아바드 -> 일하다, 섬기다
한글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없지만 히브리어 “아바드” 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예배를 표현할 때 계속 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7일 안식 이후 모든날 안식일로 삼아 자기의 일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며 섬기는 것을 예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주일날 하루만 모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는 공동체로 이렇게 예배하지만 평일 모든날은 아바드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생들이 왜 공부 열심히 해야할까요?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바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이 열심히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아바드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부들이 열심히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헌신 하는 것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아바드 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고백들을 하게 되냐하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저희 하준이를 보면서 권사님들이 “아빠랑 똑같네” 하십니다. 왜 아빠랑 똑같을까요? 아빠가 만들었으니 똑같은 겁니다. 아담으로 하와를 만들었으니 하와와 아담이 똑같습니다. 네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것은 “네가 나” 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굴 만나든 모든 삶 자체가 천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 깨져 버립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버립니다. 이 후 사람들은 안식을 잃어버립니다. 안식을 잃어버리는 증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아담이 선악과를 왜 따먹었냐는 물음에 “저 여자 때문에 따먹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정죄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 한것입니다.
이 후부터 사람들은 서로 물어 뜯고 헐뜯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 버린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 하나님과 관계를 거절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런 거절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 하셔서 다시금 안식으로 인간을 초대해 주십니다.
안식으로의 노골적인 초대가 기록된 것이 바로 십계명의 4번째에 기록된 말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입니다.
안식일은 어느 한 날이 아니고 무슨 날 이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모든날, 사람들이 서로간에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모든 날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통해 천국을 사는 모든날이 안식일 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바로 이 안식으로 직접 우리를 초대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집을 안식처 라고 합니다. 집을 집구석 이라고 표현한 가정은 지옥같은 가정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안식처가 되길 소원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안식처가 되길 소원합니다. 안식처는 가고 싶은 곳입니다. 머물고 싶은곳입니다. 이런 안식처인 가정은 자녀가 취업 못해도 밥 줍니다. 자녀가 이혼해도 사랑으로 품어줍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아들어오면 함께 울어줍니다. 그래서 안식처에는 위로가 있고 회복이 있는 공간입니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저와 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안식의 참 의미를 우리교회와 우리 가정과 우리 삶에서 구현해 내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믿는 자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을 갖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교회 다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후 죄의 결과물로 세상은 서로 물고 뜯는 경쟁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우리가 얼마 지쳐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상처 받습니까? 얼마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까? 그 때 교회가, 믿는자들이 안식처가 되어주라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이런 안식처가 되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성도 한분 한분이 안식을 구현해 내길 소원합니다.
교회가 정말 안식일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주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예배만 드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그리고 진짜 사람들을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참 의미입니다.
특별히 지금이스라엘 백성은 어디에서 탈출한
이 말씀이 애굽땅에서 종 이었던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이땅에 모든 종된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아들이나 딸이나, 종이나, 심지어 가축까지 모두 안식에 들어 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구석인가요, 안식처인가요?
우리교회는 집구석인가요 안식처인가요?
누구나 와서 행복해지는 안식의 하늘나라 천국공동체 경안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주일학교에서 십계명을 외워서 시험을 보는시간을 갖었습니다. 한 아이가 십계명을 외우다 5계명을 외울때 이해되지 않는 단어가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5계명이 뭐지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공경”이라는 단어를 잘 모르겠는겁니다. 그래도 이 5계명을 외워야 하니까 일단 외우기 시작하는데 이해되지 않는단어가 나오니까 잘 안외워 지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비슷한 단어로 외우자 해서 생각나는 단어가 뭘까 고민하다 “공격”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겁니다. 그래서 5계명을 이렇게 외웁니다. “네 부모를 공격하라”
요즘 부모를 공격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 십계명의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자녀된 자로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 이라면 백성으로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법이 왜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문제가 있으니 그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겁니다.
지난 10월13일에 더불어민주당의 강훈식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있습니다. 그 법안의 이름이 “민식이 법”입니다. 소위 민식이 법을 만들자고 국회에 의견을 내놓은 겁니다. 왜 이런 의견을 내놓았냐 하면, 지난 9월 11일에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다니다 충남 아산에서 김민식이라는 어린이가 학교앞에서 차에 치어 죽는일이 일어난 겁니다. 어린이 보호구역인데 아이들에게 이런 사고가 많이 일어나니까 사회 문제로 대두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만들어서 그 문제를 해결 하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을 만든 이유는 문제가 있으니 반 강제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보니까 이스라엘과 세상에 부모에 대한 태도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모에 대한 법을 재정하신 것이 오늘 5계명인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당연히 자녀들이 부모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 아파트 이름이 너무 어렵습니다. 타워펠리스, 미켈란쉐르빌, 현대하이페리온, 발음하기도 너무 어렵습니다. 왜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만들었는지 아냐고 물었더니 어느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못찾아 오시게 하려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답니다.
어느날 심방을 가는데 새로 지은 아파트로 심받을 갔습니다. 지하 주차장을 들어 갔는데 아파트 동과 동이 다 연결되어서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모르겠는 겁니다. 제가 동을 잘 못찾아 쩔쩔 매자 함께 심방하시던 분중에 한분이 저에게 농담을 합니다. 왜 이렇게 아파트찾기 어렵게 했는지 아시냐고? 시골 어른들이 오시기 어렵게 하려고 그런거랍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농담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런 농담이 우리 사회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들이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사라지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은 크게 2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나누었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이니 하나님에 대해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히브리식 표현인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적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중에부모에 대한 계명인 이 5계명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왜 이 단어가 들어가 있을까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고유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땅의 모든 것을 창조 하실때는 “보시기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시고는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심히 좋았던 마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부모로 세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아이를 만들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하나님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부모님은 누구의 모습을 갖고 있는겁니까? 하나님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하나님의 대린인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5계명에 집어넣고 있는 겁니다.
이런 부모를 통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부모님은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요즘 부모의 일그러진 모습들이 기사화 될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버린다거나, 아이를 낙태하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이그러지고 부족한 모습이 있지만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워진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무언가를 해줘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공경받아야 하는 겁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경외”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부모에게도 이 “경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써 하나님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3절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을 제외하고 부모에게만 이 단어를 쓰는 겁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인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겁니다.
에베소서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 = 헬라어 의미 = 본성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만드실 때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진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성이 죄로말미암아 망가져 버린겁니다. 본성은 누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는 겁니다. 본능이니까. 우리가 부모님에게 못되게 하면 마음이 괜히 불편합니다. 왜그렇습니까? 우리의 본성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 다워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대리인인 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을까요?
오늘 공경하다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보면 “카베드”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의미가 무겁다 라는 뜻 입니다.
이 무겁다라는 것은 무겁고 가볍고의 무게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비중있게 두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네 부모를 비중있게 여기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 “카베드”라는 단어가 신약에 와서는 “카바드” 라는 단어로 바뀝니다. 그런데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요. 카바드 라는 단어의 뜻은 “간” 이라는 의미입니다. 간은 모든 장기중에 가장 무거운 장기입니다. 그런데 이 간이 망가지면 몸 자체가 망가집니다. 그래서 간 경화가 무서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몸은 간이 망가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죽 하면 CF에서도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이러겠습니까? 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우리 삶에 부모를 비중있게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가 악할 때 가장 큰 특징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를 거역하는 겁니다.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를 거역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3:1~2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창세기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이 그의 사위될 사람에게 이 성이 이제 멸망한다 그러니 얼른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자고 합니다. 그 때 이 사위될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농담으로 여깁니다. 농담으로 여긴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먼지처럼 여겼다라는 의미입니다. 장인어른 될 사람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불 심판을 당합니다.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을 중요하게 여기며 부모를 거역하지 않고 순종해야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효입니다.
탕자의 비유
-> 돌아올 때 아버지가 어떻게 하는가?
->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는다.
-> 왜 끌어 안는가? 죽기전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하는 것은 엄청난 죄.
이런 사람은 동네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이게 되어있는데 유대 법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하고 끌어 안은것은 단순히 아들이 돌아 와서 기뻐서 그런것 만은 아니다.
이 아들을 동네 사람이 혹시 돌을 던져 죽을까 보호하려는 것이다.
아버지가 용서하는데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이게 우리 부모님이다.
그 부모님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합니다.
성경은 살아계실 때 공경하라 합니다.
설교를 듣고 그냥 끝내지 마시고,
전화라도 한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부모님이 주님이 품에 안기신 분은
이제 나의 자녀들에게 오늘 배운 가르침을 믿음안에서 나눌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복이 있겠지만
저는 만남의 축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셨던 목사님들이 몇분 계십니다.
그중 저의 청년 시절을 짧은 시간동안 지도해 주셨던 박정수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을 처음 만나고 훈련 받으면서 신앙의 요소 하나하나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신학적 토대는 이분의 영향이 큽니다.
이분에게 배웠던것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나라는 늘 다스림의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를 다스리고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산다면
죽어서도 하나님나라를 가겠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게 더 복된 삶일까요? 죽어서 하나님나라를 가는게 더 복될까요? 여기서부터 하나님나라를 살다가 죽어서도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 더 복될까요? 두 말할것 없이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법을 주십니다. 그 법의 핵심 내용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십계명입니다.
오늘 십계명의 6번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박정수 목사님께 함께 제자훈련 받았던 친구중에 연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군대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에 들어간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 형제가 청년 소그룹 모임을 하는데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너무 힘들 다고 하는 겁니다.
평상시 굉장히 신실했던 형제인데 그런 얘기를 해서 관심을 갖고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자신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 무기를 만드는게 고민이랍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 같아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계속 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면 좋은 직장을 잃어버리니 어떻게 해야할지 마음의 고민이 크다는 겁니다.
성경은 전쟁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사실을 몰랐던 형제는 몹시 괴로워 했습니다. 왜 괴로워 했을까요? 신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앞에서 발버둥치며 살고 있기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이렇게 실제적인 삶과 연결된 것입니다. 오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이 없는 계명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과 굉장히 깊이 연결된 말씀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 - 히 : 라차흐
일반적으로 사람을 죽일때 쓰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차흐”가 아니라 “하라그” 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럼 라차흐라는 단어를 어떨때 쓰일까요?
사람을 죽일때도 당연히 사용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짓밟는 것 역시 살인으로 규명하는데 이때 쓰는 단어가 “라차흐”입니다.
열왕기상21장에 보면 아합이라는 아주 나쁜 왕을 소개합니다. 아합이 살던 왕궁 옆에는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농사를 아주 크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밭이 너무 좋아보여 나봇에게 가서 밭을 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사고 파는 것이 아닙니다. 나봇은 이것을 잘 알고 있어서 왕이 요구 했지만 거절합니다. 거절당한 왕은 너무 아쉽고 답답해서 밥도 안먹고 침대에 누워버립니다. 이 모습을 보던 부인, 성경에 등장한 인물중 가장 악독한 여인으로 소개하는 이세벨이 자신이 뺏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세벨은 나봇에게 하나님과 아합왕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웁니다. 그리고는 소위 폭력배를 풀어서 하나님과 아합왕을 모독했다는 죄명을 씌워 나봇을 죽이게 합니다. 나봇이 죽자 아합왕은 포토밭을 차지 합니다.
실제적으로 아합도, 이세벨도 살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은 폭려배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봇의 죽음을 아합이 죽인거라고 말합니다.
왕상21:19절
“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라차흐) 빼앗았느냐 하셨다”
이세벨이 죽였다고 말한다면 이해가 됩니다. 살인을 청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당시 침대에 누워 있던 아합이 빼앗고 라차흐, 살인했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선언할까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약자의 것을 빼앗고 짓밟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무시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 역시 성경이 말하는 살인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갑질 문제가 많이 대두 됩니다. 지난주에는 30대의 남성이 햄버거집에서 일하는 청소년에게 햄버거를 집어 던지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행동들을 살인의 행동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건 역시 라차흐의 살인에 해당됩니다. 힘 있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수많은 어린생명들이 죽음에 이른것 아합왕의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 과거로 가 수년전 삼품백화점 사건. 백화점이 무너지기 전에 건물의 붕괴 조짐이 충분히 보였습니다. 불안한 직원들은 스스로 일터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건물을 수리하면 기간동안 많은 손해를 입기 때문에 회사 윗분들의 이익을 위해 건물을 보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무너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라차흐가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자신의 유익을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희생시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살인 라차흐입니다.
당시 삼풍백화점의 사장은 서울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의 중직이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도 신앙을 갖고 있다 말해도 충분히 라차흐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것입니다.
우리가 라차흐 하지 않으려면 연약하고 소외된 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약자가 누굴까요? 새가족입니다. 새가족은 먼저 믿는 사람들처럼 이해 하면 그것이 우리의 부족함이 됩니다. 누가 교회의 약자 입니까? 어린아이 입니다. 연세드신 권사님들입니다. 이분들을 건강한 성인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말 생명의 공동체가 되려면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중직일수록 교회의 약자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살인과 반대되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하는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살리려면 연약한 자를 배려하며 섬기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베이비박스에 관심을 갖어야 합니다. 미혼모에도 관심을 갖어야 합니다. 독거노인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 의미입니다.
우리교회가, 저와 여러분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살인은 왜 일어날까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최초의 살인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살인중에 가장 엄중하게 다루는 존속살해입니다.
이 살인이 왜 일어납니까?
질투 때문에 일어납니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의 예배만 받습니까? 아벨의 예배만 받습니다. 그것을 본 아벨은 분노합니다. 그 분노의 깊은 내면은 질투심 때문입니다. 질투는 분노하게 하고 결국 아벨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행위는 하나님을 도전하는 행위 였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아벨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려 합니다. 그런데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도전한 겁니다.
아벨 대신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아들을 주시는데 이름이 “셋”입니다.
그런데 이 “셋”을 왜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냐하면 “아벨 대신 주었다”고 말합니다.
셋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고,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다윗이 나오고, 다윗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나옵니다. 셋의 자리에 원래 누가 있어야 합니까? 아벨 그런데 이에 도전하는게 가인의 살인을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질투로 인한 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온것입니다.
우리가 라차흐의 살인과 거리가 멀어지려면 조심해야 하는것이 질투 입니다.
남이 나보다 잘되면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하지 말고 축복해야 합니다.
결국 라차흐의 살인과 멀어지려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장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바라”
여러분 형제를 미워하는것 살인이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성경에 영생이 없답니다.
오늘 오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사랑하며 영생의 삶을 증명하시길 축원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증명되는 올 한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요한일서3장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만이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가인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 때문에 동생을 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위해 자신이 죽습니다. 교회를 살리기 원하십니까? 옆 사람을 위해 내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내 욕심과, 내 질투심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가인처럼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얻는 것?
아니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는것? 어느것이 값집니까?
2018년11월에 교회에 부임하면서 제가 그동안 공부하고 생각한 수 많은 것들을
교회에 투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포기하고 있습니다. 왠줄 아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교회를 위한 사랑이 아님을 주님이 계속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더불어서 주님이 저에게 이렇게 물으시는것 같습니다. 형제를 위해, 성도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목사도 사람인지라 내 자아, 내 생각 내려놓고, 죽어지기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원하는 값진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죽여 교회가 산다면 그렇게 하옵소서. 나를 죽여 누군가 산다면 그렇게 하옵소서.
나를 죽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어서 여전히 죽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오늘 계명을 기억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한복음 3:16절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요한일서 3장16절의 사랑의 삶을 구현하길 소망합니다.
요한일서 3장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살인하지말라”
살인하지 않으려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사랑의 헌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전 인류를 향한 사랑의 편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반응
1. 거부
2. 동의
3. 순종 --> 하나님은 순종을 통해 역사합니다.
작년 한해 대한민국을 강타한 이슈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미투운동입니다. 미투운동이란 우리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성희롱등을 고발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해서 대한민국까지 들어온 운동입니다. 왜 이런 운동이 우리 사회까지 들어왔을까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해야 할 성에 대해 너무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일들이 일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악한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중에 성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부간의 성관계는 축복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부부 관계를 떠난 성적인 어떠한 관계도 하나님은 늘 부정적으로 대합니다.
레위기20:10~16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누군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그의 며느리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함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아내와 자기의 장모를함께 데리고 살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이는 너희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면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그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부부관계가 아닌 성관계의 끝은 늘 죽음입니다. 해마다 퀴어축제라고 하는 동성애축제가 우리나라 곳곳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우리는 정죄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추구하는 동성간의 성관계는 죽음에 해당하는 죄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우리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성애와 같은 취급을 하는 죄가 바로 간음죄입니다.
성경은 부부간의 아름다운 성관계를 제외한 성적 결합을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오늘날 너무나 흐릿해 졌습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성도들 사이에서도 이런말 합니다. “요즘은 혼수로 아이를 데리고 오는거야” 나이를 먹고 결혼하지 못한 지체들에게 “혼수라도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일 수 있겠지만 성경의 기준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동성애나 간음이나 똑같이 다루고 있는데 왜 혼전 성관계는 은근히 개방적이 되고 동성애만 반대 합니까?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에 대해 개방적이 되어 버린것입니다. 결혼전에 살아보고 결혼한다는 말도 안되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몇 년전에는 간통죄도 폐지 되었습니다. 드라마는 불륜이 들어가 있지 않는 드라마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회적 흐름에 그대로 노출된 사람들이 성애 대해 자연스레 개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부관계 아닌 성관계는 부끄러운 것인줄 압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죄 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전에는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부끄러운줄 몰랐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자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부부관계 아닌 성적인 결합은 죄요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십계명을 통해 분명 이렇게 말씀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렇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 위해
성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누릴 수 있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부부간의 아름다운 성관계를 통해 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성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가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고 싶으실까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누가 주셨다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그 자녀들은 내 자녀이기 전에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 아담을 만드시고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심히 좋았더라” 그런데 다른 세상의 피조물을 만드실때는 뭐라고 합니까? “좋았더라” 그냥 좋은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실 때는 최고의 감정적으로 최고의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심히 좋았더라 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대리인인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갖기 위해 부부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통해 심히좋았더라의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생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 생명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는지를 몸으로 체득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부간의 아름다운 성관계는 너무 귀한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합니다. 부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면 서로의 깊은 마음들을 공유합니다. 부부가 결혼해도 서로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마음을 공유하고 하나되었을때 그때 아름다운 사랑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최고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이후 인간은 성에대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본능으로의 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느끼는 카타르시스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게 되니 수 많은 성적인 죄악들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부간의 성을 허락하신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에만 사로잡힌 동물들과 다를바가 없는 존재들이 되어버립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만드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우리가 몸으로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입니다.
둘째,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지 못하고 본능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떤 문제가 일어납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가정이 있는 남녀가 서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다 결국 가정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한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혼자사는 사람이 많아 졌지만 과거에는 대가족이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던 대부분의 나라가 과거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았던 이유는 생산 때문입니다. 노동력이 많으면 그만큼 농사에 유리한 겁니다.
기본적으로 가정이 먹고살아야 가정이 든든하게 서고 그래야 가족 전체의 안식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이 든든해야 어려움이 와도 어려움을 극복할 힘이 있는 겁니다.
이런 가정과 가정들이 모이고, 모여서 국가를 이룬 것입니다. 그럼 가정들이 든든하게 서면 국가는 어떻게 될까요? 든든하게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나라도 정치인들이 서민정책에 신경을 쓰려고 노력합니까? 서민경제가 살아야 국가가 든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건강한 국가일수록 빈부격차가 적고 중산층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정책이 이런 방향으로 갈 때 우리 믿는자들은 좌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정책에 반응해 줘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적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간음은 가정을 흔드는 일 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은 단순히 성적인 일탈만을 다룬 계명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법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법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쓴 책중에 향연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사람이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었답니다. 한 몸 이었을때 인간은 힘이 쎘습니다. 힘이 쎄니까 한몸된 남자와 여자가 신들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신들이 남자와 여자를 한몸에서 분리시켜 버렸답니다. 갈라지고 나니까 이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해 졌겠어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에게 어떤 마음이 생겨나냐하면 그리움이 생겨납니다. 내 반쪽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 겁니다. 이게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인간에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부자인 남자 신과 아주 가난한 여자신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신들의 잔치가 벌어졌는데 가난한 여자신이 부자인 남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잔치에서 부자인 남자신이 술을 잔뜩먹고는 취해서 잠이 듭니다. 이때 가난한 여자신이 이 남자신 옆에서 함께 잠이 듭니다. 잠자고 일어났는데 아기 생깁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에로스입니다.
에로스는 아버지 신을 바라보면 부자이기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신을 바라보면 늘 뭔가 부족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에로스라는 것입니다. 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보십시오.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부족하지 않을것 같은데 그 돈이 벌린다고 부족함이 체워집니까? 전세에서 살다 집을 산다고 부족함이 체워집니까? 늘 부족합니다. 하루에도 12번씩 부족함을 느끼는게 우리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에로스입니다. 이 에로스인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사람들은 갖은 노력을 합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부족함을 채우려고 합니다. 어디서든 한 자리 하면서 부족함을 채우려고 합니다. 돈으로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기도합니다. 그런다고 부족함이 채워지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긍극적으로 한가지가 체워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체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부족한 것을 하나님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체우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결혼관계로 묘사합니다. 결혼을 계약이라고 하지 않고 언약식이라고 합니다. 계약은 위약금을 주고 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이라는 것은 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임에도 자주 깨집니다. 무엇 때문에 깨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을 찾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다른 신을 찾아갑니까? 이렇게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보니까 매력적인 겁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에게만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풍요”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면 풍요롭고 부자가 될것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따라갑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무슨 신입니까? 풍요의 신입니다. 다산의 신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풍요는 무엇입니까? 소출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유목민에게 풍요는 무엇입니까? 가축들이 새끼를 많이 낳는 것입니다. 다신입니다.
소출이 많아지고, 새끼를 많이 주는 풍요와 다산의 신인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요의 신이 풍성한 소출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믿었냐하면, 땅의 신과 하늘의 신이 결합할 때 땅이 소출을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가축들이 많은 새끼를 낳기 위해서는 신들이 서로 결합을 할 때 가축들이 새끼를 많이 낳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풍요의 신을 섬기는 신전에는 소위 “성창”이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이방신에게 예배하는 거룩한 창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성창”은 이방신을 섬기는 여자제사장 인겁니다. 이 성창이 예배하러 온 남자와 성적인 결합을 하는 것이 이방신을 섬기는 예배행위 였습니다. 그럼 그 예배 행위를 보고 풍요의 신은 소출을 내고, 다신의 신은 새끼를 많이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들을 섬기는 곳은 시대를 막론하고 엄청난 음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옛날 처럼 성창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풍요가 수 많은 사람들을 음란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몇 달전에 한국사회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던 “버닝썬”사태가 있습니다. 한 유명 가수가 운영하는 나이트 클럽에서 마약을 판매하고,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그곳에서 일어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돈 때문 이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소위 접대를 하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공직자들은 돈을 받고 눈을 감아주기도 합니다. 결국 풍요하고 싶은 마음이 음란의 현장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싫어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부부관계로 건강한 언약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부부간의 정절을 지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 우리 일상에서도 간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사람을 대할 때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합니다.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유명하니까 만나려고 하고, 그 사람이 돈이 많으니까 만나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어떤 사람도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체우기 위해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자신의 욕망을 체우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남성도 마찬가입니다. 부자랑 결혼해서 팔자 고친다는 생각은 사람을 수단 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남녀간에 신실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과 언약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 때 남녀간,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
설교를 한편 들었습니다. 그 설교에서 나온 예화입니다. 옛날에 원주에 가면 기차역이 있었답니다. 기차역 주변에는 소위 집창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창촌을 조금 지나면 성당이 있었습니다. 이 성당의 초기 교구장이 지학순 주교라는 신부였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기차역에서 성당을 가기 위해서는 집창촌을 지나야 했습니다.
한번은 지학순주교님이 기차를 타고 출타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주교님도 당연히 이 집창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교님이 워낙 그 지역에서 유명한 분이어서 집창촌 자매들도 이분이 누군지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교님이 그곳을 지나는데 한 자매가 장난끼가 발생한 겁니다. 이 자매가 이 주교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놀다가세요.
제가 신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되서 영등포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당시 살던 집이 영등포 였습니다. 공부하고 늦게 집에 가는데 갑자기 어머니뻘 되시는 분이 저를 붙잡더니 학생 놀다가 그러는 겁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제가 그 순간 그 분을 향해 정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뻘 되는 사람에게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렇게 정색했는데 이 주교님은 아무렇지 않게 손주 대하듯 대답을 해줍니다.
놀틈없다. 그런 주교님이 너무 재밌는겁니다. 그래서 자매가 이렇게 말합니다.
놀틈 없없으면 놀짬이라도 내세요.
짬도 없다. 짬 없으면 새라도 내세요.
새도 없다. 이말을 하시고는 이 할어버지 주교님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자매에게 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탕이나 사먹어라!
저는 정색했습니다. 왜 정색했을까요? 어떻게 이런일을 할 수 있어. 더러워. 이런 마음이 있는 겁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런 모습을 가지면 안되지 이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교님은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는 손녀대하듯 돈을 주며 사탕사먹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형상을 입은 사람. 존재 그 자체를 귀하게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부님들은 옷을 누가 봐도 신부처럼 입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집창촌 여성과 대화하는 모습 보면 오해사기 딱입니다. 윤리적으로 지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윤리적으로 그 자매를 대한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본겁니다. 하나님이 이 자매를 바라보면 어떻게 바라 봤을까요? 길을 잃은 어린양 처럼 바라 봤을 겁니다. 이 신부는 그 마음으로 자매를 바라본 것입니다.
최근 제가 좋은 문구를 하나 새기고 있습니다.
덜 이성적이고, 더 사랑하자!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님의 인생모토랍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필요한 모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은, 우리 삶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 너무 많이 보여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논리적인 자잘못을 따지는 것 보다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정말 사랑하면 어떻게 자매를 욕망의 수단으로 삼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면 타인 간음하겠습니까? 사랑이 답입니다.
사진 하나를 보고 오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사진은 한 시골에서 여자 손님이 닭을 사는 사진입니다. 닭을 사이에 두고 여자손님과 주인이 저울의 눈금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은근한 미소를 띄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런 은근한 미소를 띈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두 사람의 손에 있습니다.
손님의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울의 밑을 바치고 있습니다. 저울의 눈금이 조금이라도 덜 나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인의 손은 어디에 올라가 있습니까? 저울의 위를 누르고 있습니다. 저울의 눈금이 조금이라도 더 나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서로 저울의 눈금을 속이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속이고 있는것도 모른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며 저울을 쳐다보고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십계명9번째 시간으로 8계명을 다루는 시간입니다. 8계명이 무엇입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도둑질 하면 남의 것을 훔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것도 포함된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도둑질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목사가 되기위해 목회학석사 학위를 받아야 합니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이어지는 코스가 목회학석사 이후에, 신학석사, 그리고 신학박사로 이어집니다. 저두 기본 코스를 다 마치고 공부를 더하고 싶어서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석사 설교학전공에 입학했습니다. 입학하고 첫 학기 수업을 마치고 시험을 보는 시간 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인분들은 100% 목회자들입니다. 목회자들을 믿었던지 시험보는 시간에 감독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감독이 없으니 노골적으로 컨닝페이퍼를 보시며 시험 답안을 작성하고 계셨습니다.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며 시간을 투자 했던 저로서는 화가 났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점수를 컨닝하는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나서 시험이 끝나고 담당 교수님께 항의했습니다. 결국 시험을 다시 보았습니다. 컨닝이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노력한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노력한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게 컨닝입니다. 이것 역시 도둑질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유의 도둑질은 우리 삶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일을 행합니다. 목회자들도 이런데 일반 성도들은 어떨까요?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 우리주변에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거짓말 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지금 십계명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전까지 어디에서 살던 사람입니까? 이집트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이집트에서 살 때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수 많은 이익을 챙긴 겁니다. 여러분 십계명 첫 번째 시간에 모든 십계명의 대전제가 무엇이었습니까?
20장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왜 이 말씀을 대 전제로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했던 어려움을 기억하며 이스라엘 만큼은 누군가를 종삼고,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길 원하신 것입니다.
1988년 10월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하던 25명의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중 12명의 죄수가 호송하던 차량의 교도관을 급습해 총을 빼앗고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얼마 못가 서울 북가좌동의 한 집에서 경찰에 포위가 됩니다. 이 때 이들은 필사의 저항을 하며 인질극 까지 벌입니다. 당시 이 상황을 tv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어서 “홀리데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됩니다.
인질극을 벌이던 그 때 죄수중 “지강헌”이라는 죄수가 그곳에 모인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게 이 사회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 돈없으면 죄고, 돈있으면 죄도 죄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든, 돈을 사용하든 남을 희생시켜 이익을 챙기려는 모든 행위는 도둑질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도둑질이라는 성경 히브리어 원어로 보니까 “가나브”라는 단어를 씁니다. 성경에 언제 가나브라는 단어를 쓰는지 찾아보니 크게 4가지로 사용됩니다.
1. 사람의 재물을 훔칠때 사용됩니다. -> 우리가 흔히 아는 도둑질입니다.
2. 사람의 마음을 훔칠때 사용됩니다.
사무엘하15:6
“이스라엘 무리중에 왕께 제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 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 다윗왕을 반역해 자신이 왕이 되려는 생각을 합니다.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생각하다가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문제가 있으면 왕에게 와서 재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반드시 성문을 지나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성문에서 압살롬이 재판을 하러 온 사람들의 일을 처리해 줍니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가야할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이때 성경은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훔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고, 아버지를 희생시키는 도둑질을 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로 이야기하면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으로 백성들을 이용하는 것 이것 역시 마음을 훔치는 도둑질 이라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이 순진한 사람을 속이는 것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사람이 사람을 훔칠때 사용됩니다. - 인신매매
4.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칠때 도둑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 대표적인게 무엇입니까? 십일조입니다. 사실 모든게 다 하나님것입니다. 내 삶, 내 물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런데 그것을 인정한다는 신앙적 표현으로 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함으 로 하나님의 것은 손을 대지 않겠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것 도둑질 하지 않 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 보면 누군가를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것이 도둑질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둑질을 하면서도 도둑질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 만능주의 세상입니다. 돈이면 다되는 세상이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도둑질이 너무 만연합니다.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내 이익을 챙기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위해 어떻게 도둑질과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이 도둑질과 연결된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는 “큰슈퍼”가 있었습니다. 크기가 커서 큰슈퍼가 아니라 이름이 큰슈퍼입니다. 한번은 친구녀석이 슈퍼에서 먹고 싶은 고르라는 것입니다. 여러명의 친구들이 우르르 들어가서 이것 저것 집었습니다. 저도 몇 개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나 이것 집었으니 계산하라고 말하고 슈퍼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친구도 정신이 없었던지 계산을 하고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한참 집을 걸어오다 알게 되었습니다. 영락없이 도둑질을 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 마음이 너무 찝찝했습니다.
다음날 큰슈퍼를 찾아 갔습니다. 사장님께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어제 제가 먹었던 과자를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장님은 제가 과자를 집어간지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이야기를 하며 용서를 구하고 계산했더니 너무 고마워 하는 것입니다. 저도 너무 자유했습니다.
신약의 삭개오는 세리장 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켜 과도한 세금을 걷은것을 4배로 갚아줍니다. 4배로 갚아준 이유는 율법이 그렇게 하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회개하고 보상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것에서부터 조금씩 회개하고 보상해 나갈 때 우리는 점점 성경이 말하는 도둑질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도둑질과 거리가 멀어지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둘째, 불로소득을 즐거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농구선수 출신으로 방송을 하고 있는 서장훈씨가 있습니다. 서장훈씨는 빌딩 부자입니다. 빌딩을 사면 빌딩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이 엄청납니다. 강남에 있는 빌딩이라면 엄청난 수입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서장훈씨는 강남 주변 시세의 반값으로 월세를 내놓는 답니다. 그리고 입주자가 스스로 나갈 때 까지 원세를 올리지 않는답니다.
언젠가 서장훈씨가 그렇게 한 이유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월세를 올리지 않으면 건물에서 세를 얻고 사는 사람들의 형편이 낳아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있는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게 사람의 심리 아닙니까? 그런데 서장훈씨는 함께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방송이라는 일을 통해 수입을 얻는 것에 기쁨이 있답니다.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지금 일하는 것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편하게 벌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일을 통해 돈을 버는게 기쁨이랍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불로소득을 경계합니다. 투기를 통해 얻어지는 수익을 금합니다. 이자놀음을 해서 얻어지는 수익을 금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도둑질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도둑질과 거리가 멀어지는 삶을 사려면
세 번째, 자족해야 합니다.
모든 도둑질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탐욕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가 죽기전 병상에 누워 있을때 친구가 찾아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는 얼마를 벌어야 만족 하겠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금더.
여러분 어떤 사람이 최고의 부자인줄 아십니까?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사는 것 보면 집도 허술하고, 먹는것도 너무 빈약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세상적인 실패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산으로, 바다로 나가서 사는데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족하면서 삽니다. 하나같이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욕심, 탐욕이 도둑질로 가게 하고, 그 끝은 정말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는 자연인은 자연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워 나갑니다. 그리고 자족 할 때 참된 행복의 삶을 삽니다.
우리가 이런 행복의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서로 뺏고 뺏기는 동물의 세계같은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에굽의 노예처럼 누군가에게 희생되고, 이용당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계명을 기억하고 우리교회는 참된 가족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9계명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이웃에게 거짓증거 하지 말라”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하니 흔히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증거의 “증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에드”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는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증거”라는 의미보다 “증인”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법원에서 증인을 세울 때 증인 선서를 합니다. 그때 증인의 선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추호도 거짓이 없는 말, 사실만을 말 할거라고 선서합니다. 만약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증인의 말에 따라 사건 해당자가 누명을 쓰고 피해를 입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인의 사명은 사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쓰는 단어가 “에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네 이웃에게 거짓증인이 되지말라”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쩌다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의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거짓의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할까요? 거짓의 사람은 신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신뢰를 잃어버리면 무슨 말을 합니까? “콩으로 매주를 쓴다고 해도 안믿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짓의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으로부터 이런 얘길 듣지 않기 위해서 오늘 9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기독교 윤리실천 본부에서 여론조사를 한 데이터가 올라왔습니다. 19세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기독교의 신뢰도에 대한 기록에 10명중 6명이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신뢰를 잃어버리면 교회가 외치는 말은 콩으로 매주를 쓴데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교회에서 예수님이 생명이고 진리라고 외쳐도 안믿게 되는 것입니다. 신뢰를 잃어가면서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여한 현상입니다. 이 통계를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픈 겁니다.
거짓증인되지 말라! 이 말씀은 뒤집어 보면 신뢰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뢰의 사람이십니까?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뢰의 사람입니까?
처음 사역을 중등부 사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중학교2학년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외계인 이라고 합니다. 청소년 사역자들 안에 이런 농담이 있었습니다. 북한이 왜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지 못하는지 아느냐? 중학교2학년 때문이랍니다. 중학교2학년들 사춘기를 겪으며 중2병에 드는데 무섭게 반항 하는 겁니다. 이런 아이들이 무서워서 북한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우스게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 아이들을 케어하는 사역을 첫 사역에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외계인 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아이들을 대면해 보니 사랑이 너무 목말라 있는 겁니다.
너무 귀여운 겁니다. 교사들에게 아이들에게 마음을 쏟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교사중 일부가 교사로 섬기는데 너무 불성실 한겁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마음을 쏟아 아이들을 케어 해달라고 부탁 드렸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교사들을 신뢰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몇몇 교사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전도사인 저는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고, 교사들은 시간을 투자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니 너무 강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논리적으로는 옳은 말 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마음이면 교사를 내려 놓으라고 권면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세상의 자원봉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대충 하는 겁니다. 주어진 상황에서만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 오래 했으니 뭐라도 해야 해서 하긴 하는데 충성은 없는겁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아이들이 신뢰하고 따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나라를 위한 봉사는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한 자리에 참여 시켜 주시는 겁니다.
교회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나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일하지 않아야 주님이 일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일하시는 것에 부족한 나를 참여 시켜주시는 것이 교회에서의 봉사입니다. 그 일 우리가 감사한 마음에 성실히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제가 권고사직을 시켰습니다.
이제 부서는 정말 마음을 쏟아 아이들을 사랑할 교사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에 2시간씩 헌신할 사람, 왜냐하면 매주 제가 공과를 썻는데 교육을 받아야 아이들 공과를 진행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공과 교육 후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먼저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니 2시간은 필요하더라구요.
그 시간을 통해서 먼저 교사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들이 토요일 아이들을 위해 모이는 2시간을 사모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모하며 아이들에게 마음을 쏟기 시작하니 외계인 같던 아이들이 교사들에게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기 시작합니다.
처음 부서를 맞았을 때 아이들이 30여명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중 25명 이상은 예배가 시작하면 엎드려 자는 겁니다. 그런데 교사들이 마음을 쏟으니 아이들이 교사들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교사들과 주중에 사적인 만남도 갖습니다. 고민도 상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말씀은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겁니다. 30명으로 시작한 그 부서는 3년후 60명이 되었습니다.
60명이 되자 담임목사님이 고등부와 합쳐서 청소년교회를 하라는 겁니다. 청소년교회로 120명 까지 부흥한 아이들의 주일예배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30분찬양, 30분말씀, 30분기도, 30분 공과 10시반에 시작한 예배는 12시반이 되어야 끝났습니다.
그렇게 졸던 아이들이, 외계인 같던 아이들이 어떻게 이런 귀한 모습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교사들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서로간의 두터운 신뢰가 생긴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겁니다. 말씀이 들려지니 영혼이 사는 겁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맞겨진 일은 성실히 하는데 교회에서 맞겨진 일은 대충하려는 사람들 안타깝습니다. 반대로 교회일은 열심히 하는데 가정일, 소흘히하는 사람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교회일도, 가정일도, 직장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가 회복되어야 사람들이 신뢰가 가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왜 거짓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왜 신뢰의 사람이 되라 하실까요? 신약의 표현으로 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을까요?
이사야43:10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증언할 때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의 말은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겁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복음을 증언할 때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약한자들과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신뢰를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교회가 1층에 왜 도서관을 시작했을까요? 단순히 전도를 위함이 아닙니다. 지역사회로부터, 우리교회가 신뢰의 대상으로 서기 위함입니다. 신뢰의 대상이 될 때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외치는 복음이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설날에 동생집에서 저희 가족이 모였습니다.
동생부부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길 하더니 주변에 예수님을 믿으며 매너 없고, 젠틀한 사람 몇을 얘기하며 안좋은 소릴 하는 겁니다.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믿는 사람들이 더해.
저희 동새 부부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더해”라는 말을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살고, 모두가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지 않길 바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요즘 층간 소음 많습니다. 모두가 전화해서 조금만 뛰라고 할 때 우리는 괜찮다고 얘기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배려하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수용하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따듯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네 이웃에게 거짓증인이 되지 말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포함된 계명인 것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7장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 핵심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본문 7:12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대접받고 싶은 데로 먼저 대접을 하라는 겁니다. 비슷한 말이 사자성어에도 있습니다. 역지 사지사지. 입장바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입장바꿔 생각하면 용납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따듯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하나님의 백성다운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에 사탄을 향하여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거짓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은 죄중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거짓중에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값을 치르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상태를 다시 태어난 상태, 거듭난 상태라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가 거듭났다면 이제 거짓의 아비를 따르는 모습들을 버려야 합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음해, 정죄, 비난등 사람과의 관계안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하나 둘씩 정돈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삶 우리의 힘으로 많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서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은혜안에 거하며, 아버지되신 하나님알아가게 되면 하나씩, 하나씩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신뢰받게 되고,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거짓증인이 되지 말라!. 신뢰받는 삶을 삽시다. 그로 말미암아 증인의 삶을 삽시다. 이런 삶 위해 더욱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소원합니다.
혹부리 영감이라는 전래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동네에 턱에 혹이 달란 착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이 노인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나무를 하다 그만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저물에 마을로 내려오지 못한 노인은 근처 폐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막상 폐허에 들어가 보니 너무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노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때 도깨비 무리가 나타납니다. 노인은 깜짝 놀라 벌벌 떨게 됩니다.
벌벌 떨고 있는 노인에게 도깨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영감 노래 잘 부르네, 그 노래는 어디에서 나오는거야?
그러자 노인은 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깨비는 노인에게 그 혹을 자신들에게 팔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온갖 금은 보화를 주고는 혹을 떼갑니다.
노인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건넛마을에 살던 혹이 달린 심술쟁이 노인이 배가 아팠습니다.
심술쟁이 노인은 착한 노인을 찾아가 어떻게 혹이 떼졌는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착한 노인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해줍니다.
심술쟁이 노인은 자신도 혹을 떼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어서
착한 노인과 똑같이 합니다.
나무를 하러 가고, 밤늦게 빈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잠시후 도깨비들이 나왔습니다. 도깨비들이 나오자 마자 도깨비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 노래는 혹에서 나오니 사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깨비들이 다짜고짜 심술쟁이 노인을 도깨비 방방이로 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착한 노인에게서 뗀 혹을 심술쟁이 노인에게 붙여 버립니다.
욕심을 부리고 혹때러 같다가 혹 붙이고 온 것입니다.
어린들이 보는 전래동화에는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많은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는 것입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그래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전래동화라는 통로를 이용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야기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십계명의 10번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본문에 “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트”라는 단어를 씁니다. 여러분 “벧엘”이 부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집 이라는 뜻입니다. “벧트(집) + 엘(하나님)”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단어가 “베트”입니다.
그런데 이 베트라는 단어는 단순히 건물 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 주인이 가진 모든 것,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이불, 옷, 신발 모든 소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십계명은 이웃이 가진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탐내지 말라고 하는 대상이 이웃의 소유인 “소”, “나귀” 뿐만 아니라 “남종”, “여종” 그리고 “이웃의 아내”가 포함 됩니니다. 아내가 포함된 이유는 이당시 여자는 인권이 없었습니다. 그냥 여자는 물건과 똑같은 재산의 일부로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대상에 동물 뿐만 아니라 이웃의 아내가 포함된 것입니다.
결국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은 이웃의 집이 가진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무엇인가 탐을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탐을 내는 것입니다. 왜 이런 부족함을 느낄까요?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할때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살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직접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면 부족함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면 끝없이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 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쫒겨 납니다. 쫒겨나면서 남자에게 어떤 징계가 내려 집니까? 일하고 노력해서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것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땀을 흘려서 얻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족함이 생길까요? 생기지 않을까요? 당연히 부족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담때에 하나님이 부족함 없이 주신 것을 경험한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성은 끊임없이 부족함 없는 삶을 갈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부자들도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라도 더 가질려고 발버둥 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간의 노력으로 열심히 돈을 벌고 부족함을 채우려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만큼 풍족하겠습니까? 부족한 겁니다. 부족하니까 이 부족함을 채우려고 갖은 방법을 사용 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저지르고, 죄악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들 부족함이 채워 집니까? 아무리 인간의 방법으로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셨던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인간을 탐욕은 채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극복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까요? 역발상의 경제개념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족하는 사람은 부족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상황을 보십시오. 전세계에서 12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6.25직후에는 필리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나라였고,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가 우리나라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난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60,70년대를 비교해 너무나도 풍요로워 졌습니다. 그런데도 매년 우리는 무슨 얘길 듣고 살아갑니까? 경제위기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경제위기라고 우리가 실제로 그 옛날 밥먹고 살기 어려운 지경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경제위기 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은 영원히 이루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는 영원히 경제위기라는 틀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역발상의 결제개념은 바로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것은 “풍요로움”의 기준을 바꿀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풍요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대기업가서 돈 많이 버는 겁니다. 장사를 해서 수입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풍요의 기준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무엇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풍요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허락하신 것이 이미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돈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지 않고 하나님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돈이 조금 부족해도 불편하긴 하지만 불행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부요함을 하나님에게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서 경험합니다. 돈에서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여전히 돈을 믿고 사는 겁니다. 그러나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돈과 하나님은 믿음의 문제에서 늘 경쟁상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데 여전히 탐심에 젖어 살아간다면 사실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헌금 왜 합니까? 신앙고백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헌금이라고 하지 않고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돈이 나를 이끄시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다는 고백이 십일조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지갑이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풍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풍요로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인식을 늘 하며 살아갑니다. 돈이 조금 부족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넉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족할때도, 넉넉할때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인식을 하며 사는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풍요를 었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풍요를 얻기 때문에 이웃의 소유를 탐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살인 안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간음 안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거짓말안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도둑질 안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거짓말안합니다.
하나님으로 풍요로운데 뭐가 부족해서 다른것을 탐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자족입니다.
탐심을 넘어 하나님으로 풍요로우며 자족한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빌립보서 4:11~14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지금 이 말씀을 할 때 바울은 감옥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자족한답니다.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어디에 있던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주님의 능력으로 돈 때문에 못할 일이 없고, 돈과 상관없이 무슨일이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순살 정도의 노인이 큰 백화점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구걸을 하는동안 얼굴의 미소를 잃어버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여섯 살 정도의 한 어린이가 동전을 들고 거지에게 다가왔습니다.
거지노인은 동전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받았습니다.
500원짜리 동전 이었습니다.
동전을 받은 노인은 정말 해맑은 미소를 아이에게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 줬습니다.
아이는 너무 좋아하며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 뛰어갔습니다.
아이 엄마는 너무도 놀랐습니다.
딸의 손에는 500원짜리 동전이 2개가 들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노인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가 드린거은 500원인데 그냥 돌려주신것도 아니고 500원을 더 보태서
주셨더라구요. 그러면 안될것 같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이의 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 주세요. 아이에게 누군가를 도우면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 받는 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어요”
이 노인이야 말로 가진것과 상관없이 정말 풍요로운 사람 아닙니까? 가진것과 상관없이 자족하는 사람 아닙니까? 여전히 우리는 하나라도 더 가지고 누리기 위해 욕심속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갖고 누리기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누군가의 것을 탐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그럴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으로 풍성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 십계명을 마무리하며 우리 삶을 돌아봅시다. 나는 얼마나 예수님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지. 나는 얼마나 자족하는지.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는지.
십계명의 시작이 무엇 이었습니까? 너를 애굽땅에서 종되었던 곳에서 인도해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으로 풍요로워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낮선땅 가나안땅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는 길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