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이란 나라는 과거 대한민국의 다른 이름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에 근간을 두고 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유교에서 예를 중시하는 것 때문에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를 중시하는 유교의 굉장히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조선,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 현재의 대한민국은 “예” 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걷과 속이 달라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라는 이름으로 걷과 속이 달라야 함을 가르치는 사상은 기독교 세계관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걷과 속이 같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예” 라는 이름으로 걷과 속이 다름을 어른들에 의해 계속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고픈데 누군가 밥 먹었냐고 하면 배고파도 밥 먹었다고 예기하는 것이 예라고 합니다.
누군가 용돈을 줄 때 아무리 받고 싶어도 한 두번 사양하는 것이 예라고 가르칩니다.
추운 겨울날 난로 앞으로 오라고 해도 저는 안춥다고 얘기하는 것이 예라고 가르칩니다.
“예” 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걷과 속이 다름을 교육하고, 교육 받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살기에는 아주 필요한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속마음 그대로 표현하면 버릇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전통을 지켜 소위 말하는 예를 지키며 사는 것은 그런의미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님 대할때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하나님께 표현할 때 너무 예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표현을 쉽게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표현이 무엇입니까? 찬양입니다. 기도입니다. 속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잘 못합니다. 기도를 잘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예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쁘다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고,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 실 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 아니라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기시 전에 오늘 본문 5절에서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식이란 단어는 헬라어 “휘포크리테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전에 대 전제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우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극중 케릭터를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하는 케릭터를 연기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보는 시간이지 연기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진실하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길 원하셨지만 당시 외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이라는 집단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기도합니다. 말을 화려하게 하고, 말을 많이 합니다. 큰 소리를 내서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겉으로 신앙을 표현 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이 좋음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해 연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기전에 이런 외식하는 모습, 즉 내면은 하나님께 진실하지 못하며 사람에게 보이려는 모습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외식을 이토록 경계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는 것은 진실함이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 진실함을 원하셨던 예수님은 8절에 외식하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본받지 말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첫째, 골방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은 어떤 곳입니까? 헬라어 “타메이온”이란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의 뜻은 “밀실”이라는 의미입니다. 밀실은 은밀한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골방은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왜 은밀한 곳에서 만나라고 했을까요? 그곳에서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식할 염려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골방에서 기도하는 골방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골방기도를 할 때 하나님은 “갚으시겠다”라고 합니다. “갚으시겠다” 라는 말은 응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기도응답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우리는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골방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훈련이라는 책”을 쓰신 로렌스라는 수사가 있습니다. 로렌스 라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접시를 닦는 일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접시를 닦는 부엌을 자신의 기도하는 골방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접시를 닦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접시 닦는 주방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골방이었습니다.
여러분 골방은 꼭 방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학교 책상이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길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앉아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장소가 바로 골방입니다. 이 골방에서 외식하지 않고 기도할 때 주님은 기도응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할 때 화려한 수식어를 빼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나 화려한 수식어를 많이 씁니다.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당신은 자비롭고 영화로우십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광대하시고,
알파와 오메가 이며, 은혜가 한이 없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이런 수식어를 잔득 붙여서 기도합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하는 분들게 묻고 싶습니다. “영화”가 무엇입니까?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비”는 또 무엇입니까? 그 안에 있는 진실한 의미도 모른체 온갖 화려한 인용구를 붙이는 기도는 그야말로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특별히 오늘 7절에는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중언부언이란 “마음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수식어를 넣는체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것야 말로 마음 없이 기도하는 중언부언 아니겠습니까?
마음도 없는데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 욕망은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외식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갓난아이는 울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해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지금 꼭 필요한 것을 기가 막히게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행동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의심 없는 한마디의 울음소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하나님께서 이미 구할 것을 아시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것을 알고 계시는데 왜 꼭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응답을 준비해 놓고 우리가 하나님
을 찾게 하시기 위해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응답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찾는데 무슨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하겠습니까?
입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 못해도 꼭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귀를 만드신 분 역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들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인데 화려한 수식어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기 전에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모습, 사람들에게 뽐내고 잘 보이려는 것을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모습이길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1장1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이 가르쳐준 모범 기도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알려 주십니다. 당시 유대교의 전형적인 일일기도문인 카디쉬도 예수님의 주기도문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왜 똑같은 세례요한의 기도문과 카디쉬의 기도문을 가르쳤겠습니까?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알고 있고 하던 데로 기도 하되 마음을 온전히 하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똑같은 기도문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오늘 주기도문을 소개하고 있는 성경은 예수님이 산에서 설교한 내용 중의 일부분입니다. 설교의 시작은 5장이고 끝나는 장은 7장입니다. 즉 5장~7장은 한편의 예수님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시작이 8복이야기로 시작합니다. 8복이야기중 마태복음 5:8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 헬 – 카다로스 : 겉과 속이 같은 사람
기도할 때 걷과 속이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5~7장의 설교를 정리하면서 7:21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외식하는 자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기도할 때 진실함으로 하길 소원합니다. 골방에서 내 마음을 온갖 수식어로 체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하나님앞에 들어내며 기도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진정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할 때 대 전제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외식하는 것이고 연극하는 것 입니다.
진짜 기도는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기도생활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내가 다른 사람의 기도생활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운전할 때 소형차가 지나가면 옆에 좋은 차들은 그 차를 무시합니다. 보이는 것이 초라해 보이기 때문에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판단합니다. 방언하고 격력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영성있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혼자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지만 사람들이 있는곳에서 성격상 방언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성 없다 치부하고 부족하다 치부합니다. 허나 우리는 각 사람의 기도에 대해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진짜 영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이 있고, 대화가 있는 사람이 영성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만의 골방을 만들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입니다. 교제입니다. 둘만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골방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중언부언입니다. 마음이 없는 중언부언의 기도는 사람을 의식하는 외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한마디의 기도를 마음 없이 하는 긴 기도보다 하나님이 기뻐 하십니다.
외식하는 것을 금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주기도문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지만 원문에 보면 “우리의 아버지여”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기도의 대상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부처상을 앞에 두고 100번이고 1000번이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기도의 대상이 조상들입니다. 그래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하며 조상들에게 자신들의 소망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먼저 알려주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처음 부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14:36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 우리나라에서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36의 번역은 그런 의미에서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 우리는 아빠가 가진 모든 권리를 부여 받습니다.
저는 누나가 세명이 있습니다. 그중 셋째누나는 6살난 아들이 한명있습니다. 올 초에 셋째누나는목포에서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새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새 아파트로 이사하니 누나의 아들인 조카녀석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처음 집을 사고 이 녀석이 좋았던지 시골에 계신 저희 어머니, 그러니까 조카의 외할머니에게 가서는 이렇게 자랑하더랍니다.
할머니 이거 내집이다.
여러분 사실 그 집은 저희 매형명의로 된 집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매형집입니다. 그런데 6살 아이는 아빠집이라고 하지 않고 내집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할 때 아빠집 가자 하지 않고, 우리집 가자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빠집이 내집이고 우리 가족 모두의 집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것이 내것이기 때문아닙니까?
이것이 마땅히 누려야할 자녀의 권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이런 권리가 우리안에 있게 되는 것이빈다. 그런데 여기기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을 수록 부모님에게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졸라대기만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먹고 철이들어 성숙해 지면 오히려 부모님의 기쁨이 됩니다.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깨달으면서 깨달은 만큼 효도하게 됩니다. 더욱 부모를 공경하고, 더욱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뭐가 필요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녀된 의무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하며“아버지”라고 부를 때 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갖는 의미를 세기며 기도해야합니다. “아버지” 라고 부를 때 아버지가 가진 권리를 우리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고 동시에 자녀된 의무가 무엇인기 기억하며 주기도문을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예배 끝날 때 외우는 주문이 아닙니다. 진실함으로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에 대한 의미를 세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나 개인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아버지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고원영목사의 아버지인 동시에 여기에 예배하고 있는 모두의 아버지 이십니다. 아버지가 한분이시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가족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만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가족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면 우리는 모두 가족입니다.
제가 아버지가 되어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자녀들을 제일 크게 혼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자녀들이 싸우는 겁니다. 가족이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배력하고, 서로를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생각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있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면 우리를 향해 똑같은 마음 가지실 겁니다. 형제들끼를 서로 위하길 원하는 겁니다. 형제들 끼리 서로 배력하길 원하시는 겁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길 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재벌가에서 아버지의 유산상속 문제로 집안싸움을 하느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화해를 했던 장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묻힌 무덤 앞 이었습니다. 각기 떨어져 있을때는 서로 개인의 아버지 였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재산은 내게로 와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족간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묘소 앞에 가족이 다 모여 보니 그제서야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 모두의 아버지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그 재벌가는 아버지의 무덤에서 화해가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아빠라고 진실하게 고백한다면 교회 안에서 이런 화해가 이뤄지고 사랑이 들어나야 합니다. 소외되는 형제를 바라보고 아파하고 안아줘야 합니다. 이런 가족이 행복한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따듯한 형제애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되시고, 이곳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한 형제임을 늘 고백하는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기도의 대상인 우리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우라노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우라노스”의 복수형인 “우라노이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복수라는 말은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만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원어상으로 정확한 표현은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늘 하면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생각합니다. 영어로는 sky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늘은 그런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곳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에도 계시자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이 땅에도 계시면 땅도 하늘이 됩니다. 하나님은 땅에도 계시지만 바다속에도 계십니다. 그러니 바다도 하늘입니다. 그런의미로 하늘이 하나라가 아니라 여러게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모든곳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어디나 하늘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늘의 하나님이시니 어디서든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버클리음대 건반곽 작곡을 전공하고 지금 대중가요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김지혜라는 자매가 있습니다. 이 자매를 중학교1학년때부터 고3까지 6년을 양육했습니다.
이 자매가 고3이 되던 여름 이었습니다. 입시의 압박이 있었지만 여름수련회를 가서 은혜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 가기 전날 이 자매를 레슨 하던 교수님이 여름수련회를 가면 레슨을 끊어버리겠다고 반 협박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루가 아까운 시간인데 3일을 빼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련회를 너무 가고 싶었던 지혜자매는 울면서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기독교인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교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그분이 누군지 모르지만 전능하신 하늘들의 하나님이라면, 그분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면 형제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상황을 역전 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그 자매에게 교수님을 향해 하루라도 참석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리라 했습니다. 감사하게 첫날 참석을 허락 받았습니다. 첫날 저녁 예배를 드리기 전에 지혜를 위해 모든 선생님들이 마음모아 다시한번 기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지혜자매를 데리로 지혜자매의 아버지가 수련회 장소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때 교수님에게 전화가 온 것입니다. 전화를 하시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데 네가 하나님 만나는 길을 막은 것 같아 회개했고, 나의 믿음이 없음을 회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지혜자매의 아버지는 장로님 이셨습니다. 장로님역시 어런 고백을 하십니다. 장로가 돼서 딸이 하나님 만나는 것이 우선인데 딸을 데리로 와서 너무 부끄럽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합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늘들의 하나님입니다.
태양은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뜨고, 미국 멘하탄에도 뜨고,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뜹니다. 하지만 그런 태양도 지하에는 못미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서울, 멘하탄, 아프리카오지 뿐만아니라 지하 100층, 우주, 그 어디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든 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죄를 짓는 현장에 하나님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가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죄와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교회 밖에서는 전혀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같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터전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들의 하나님입니다.
하늘들의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우리모두는 아버지를 아버지 답게 여기는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자녀로 누릴건 누리고, 책임을 다할것은 행하며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갈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이 아버지되어 누리는 큰 은혜의 축복이 들어나게 될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진실하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나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아시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소리지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말을 한다고 응답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반복적으로 외우기만 하면 되는 주술적 기도나 종교적 의식 중에 한 부분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를 잘 가르쳐주는 기도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땅의 반대말이 아니라 원어로 복수로 씌여져 “하늘들” 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단순한 신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 한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향하여 우리는 어떤 기도를 먼저 해야 할까요? 그것은 오늘 제목과도 같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문장을 원어로 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원어로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라는 문장을 씁니다. 그 의미를 그대로 풀어보면 “주의 이름이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수동태로 씌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통로를 통해 거룩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이말을 다시 좀더 쉽게 풀어보면 “나에 의해 주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기를 바랍니다” 이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높아기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기도제목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기도할 때 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고백하며 내 삶을 거룩한 산 재물로 드릴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하면 누가 욕을 먹습니까? 부모가 욕을 먹습니다
자녀가 잘하면 역시 부모가 칭찬을 받습니다.
잘하든 잘못하든 그래서 나온 말이 “부전자전”이란 말 아니겠습니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자녀된 우리의 모습이 곳 아버지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거룩해 지면 주님의 거룩함이 들어납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거룩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 코데쉬 – 분리됨이라는 뜻으로 --> 세속적인, 불경스러운의 반대말
헬라어 : 하기오스 – 하나님께 바쳐진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에 불경스러운 세상의 문화에 젖어살지 않고 예수님 닮은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2장24절에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삶이 형편 없음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상 최고의 정보자 알렉산더 대왕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중에는 알렉산더대왕과 똑같은 이름을 갖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하 알렉산더는 하는 일 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문제를 일으킬 때 마다 동료 병사들이 알렉산더의 이름을 부르으면서 온갖 욕을 하게 됩니다. 사실 알렉산더 대왕이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는데 부하가 똑같은 이름으로 욕을 먹고 있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알렉 산더대왕은 부하 알렉산더를 조용히 부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을 바꾸어라, 바꾸기 싫다면 네 삶을 바꾸어라! 그래서 내 이름에 욕 먹이지 말아라”
여러분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독교인 이라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것입니다. 왜 이런 조롱을 당하고 있을까요? 부하 알렉산더 대왕이 욕먹었던 것처럼 우리가 욕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욕을 먹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욕하고,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부모님께 대드니까 욕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노예의 습관이 있습니다. 왕은 왕으로서의 해오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하고 결국 하나님이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개라고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저와 여러분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뀌어 불경스런 세상의 문화에 젖어 살지 않은 구별된 삶을 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칭찬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곳 하나님이 인정받고 그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백성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놓아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삶이 형편없음을 보고 지적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기도문하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 내 삶이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고 똑같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준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쉽습니까? 학교에 수업받고, 학원가고 모든 생활이 믿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똑같은 삶의 패턴에서 구별되며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삶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수동태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그렇사는 것 힘들꺼야!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줄께!!! 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 주시기 때문에 구별된 삶이 힘들지만 살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가 한 친구를 왕땅 시키며 빵 셔틀 시켜도 나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가 컨닝해도 나는 컨닝 안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라 모두가 부모님께 반항하더라도 나는 구별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힘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도와 주시면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전도가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만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삶으로 보여 줄 때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들 때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교회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나라 기독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기독교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구별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계속 쇠퇴하고 있고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거룩함을 회복한다면 다시한번 교회는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주기도문 첫시간에 나누었던 것처럼 마태복음 5~7장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문입니다. 그 설교문의 핵심은 하나님나라 즉, 천국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확장될 줄 믿습니다. 산상수훈의 서론격인 5장에서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삶이 착한 행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착한 삶을 의미합니다.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함께 동행하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다른 관점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세상과 다른 기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의 삶을 사는 것을 바로 세상의 소금된 삶이요 빛된 삶이라고 5장에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없으니 교회가 쇠퇴하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믿는 자 다워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구별된 삶을 통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 구별된 삶은 우리 힘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신앙과 삶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 교회에서의 모습과 직장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신앙이 삶이어야 하고, 삶이 신앙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만큼 삶에서 믿음의 모습이 묻어나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직장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청하는 영역은 모든 영역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삶으로 거룩함을 들내길 원하십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스텐리존스라는 선교사입니다. 스텐리존스 선교사가 인도에 선교를 하러 가서 마하트마 간디를 만났습니다. 간디를 만날 때 마다 간디가 성경을 인용하길 좋아하고 성경 읽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스텐리존스 선교사가 간디에게 성경을 그렇게 읽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간디가 이렇게 말합니다. “난 예수를 존경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니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간디의 발언은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상당히 어리석은 발언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정말 구별되었다면 간디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나라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전능하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길 원합니다. 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내 삶이 거룩한 삶이 아니고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닮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예수님 닮은 살을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뿐만아니라 삶 전반에 걸쳐 거룩한 삶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학원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 갈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도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삶이 전제 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말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나라”라는 의미보다는 “천국”이라는 의미가 익숙합니다. 천국은 하늘나라 라는 한자어입니다. “천국”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만 사용합니다. 그 외에 성경은 천국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나라”로 표현합니다. 왜 마태복음에서만 “천국”이라고 표현했냐하면 마태복음은 유대인, 즉 정통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씌여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통 이스라엘백성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십계명의 제3계명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긴다고 생각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 라고 표현하는 것이 사실 더 옳은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었기에 “천국”이라고 표현 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하나님나라가 같은 의미로 씌여졌지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을 마음껏 부를 수 있으니 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향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무엇일까요?
오늘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나라”라는 단어는 “바실레이아”라는 헬라어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왕이 통치하는 왕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속에 주몽왕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고구려는 누구의 나라입니까? 주몽의 나라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주몽이 고구려를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입니까? 우리 국민들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국민들이 투표라는 제도에 의해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통치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도 이와 같이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만약 오늘 예배하고 있는 우리의 왕이 하나님이면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고 있다면 이미 내 삶은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잘못 알고 있는 개념중 가장 대표적인 개념은 천국이라는 개념입니다. 천국은 죽으면 가는 곳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죽으면 가는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그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임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나라를 가게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임하다”는 의미의 헬라어는 “엘코마”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다른곳에서 나에게 오는것”을 의미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이라는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를 오게하여 주시며” 이 번역은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한 번역입니다.
여러분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달려갈 때 정면에 있는 먼 산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그 산쪽을 향해 가고 있지만 어느순간 그 산이 내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는 순간 생의 마감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태어나는 순간 죽음역시 나에게 오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 죽음에서 해결되는 길은 죽음 아닌 생명이 나에게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생명으로 이 땅에 그리고 나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미 오셨고 그 예수님을 내 삶의 왕이요 주인이라고 인정하면, 죽음이 아닌 바로 오늘 하나님나라가 나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개념은 무척 어려운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부터 몇 천년에 걸쳐 내려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실제로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들어온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진노안에 들어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뿐만아니라 신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에 종교생활을 가장 잘했던 사람은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드렸지만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니다. “화 있을진저” 이말은 간덩이가 부었다는 말입니다. 간이 부으면 어떻게 됩니까? 간경화로 인해 죽게 됩니다. 즉 너희들 그렇게 살다간 죽을것이라는 경고를 한것입니다. 경고가 있다는 것은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돌이키게 되면 징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의 선택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향해 달려가고 죽음은 내게 오는 과정속에서 예수님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선택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회개는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면서 내 의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장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부모님이 장로님이고, 권사님이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 생활했으니까 하나님나라 백성이라고 착각합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소위말하는 모태신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학이 되어 이 자매가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가게 되니 부모님의 권유도 없고 자연스럽게 교회를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학생활은 굉장히 외롭다고 합니다.
저와 가까운 정성철이란 형제가 작년에 독일에 유학을 같는데 거의 1주일에 한번씩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이친구가 저에게 페이스북 쪽지를 남겼습니다. 외로워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통하고 주변에 외국인 친구들이 많이 있기 하지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 외롭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도 이렇게 굉장히 외로웠습니다. 너무 외로우니까 죽을 것 같았습니다. 자매가 이대로는 자신의 삶에 문제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파구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이 자매가 교회에서 기도하던 모습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이 자매는 외로움을 극복하고 싶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20년이상 교회를 다녔는데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답니다. 이자매가 고민하다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우리아빠 장로입니다. 우리아빠가 장로이면 뭐합니까 내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 하나님나라는 우리 부모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13절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는 어떤자에게 임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따르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따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훈련하면서 왜 큐티를 해야하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체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합니다. 즉 말씀이 하나님이기에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믿고 따르는 것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 요청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같은 자의 것이라고 말하고있습니다.
어린아이란, 순수하거나 잘 배우정도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어린아이들은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을 말합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고 지킬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능력, 가정의 배경, 경제적능력, 스펙, 대학, 그것들이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하나님나라에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할까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자만이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을 보면 공부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원래 공부는 하나님이 만드신 온 세상을 배워나가는 흥미진진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왜 공부가 스트레스가 되어버립니까? 대학을 가기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잘하고 대학을 간다고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대학중요합니다. 공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켜줄 것이란 생각을 하니까 시험때 교회를 안오고 예배를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사단은 절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원수처럼 다가 오지 않습니다. 아주 달콤하게 친구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의지할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어떤것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모두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런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9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거든 찍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손, 한다리, 한 눈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손, 두다리, 두 눈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낳으리라”
만약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금 손발이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은 또 이런말씀이 나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들은 팔, 다리를 잘라버리고, 돈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우리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이것도 가져라, 저것도 가져라, 좋은대학 가야되고, 좋은직장 가져야 되니 교회는 잠시 빠져도 좋다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읍시다. 하나님나라가 먼저입니다. 대학도 중요하고 시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나라가 먼저입니다.
오늘 말로만 “나라이 임하시오며”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의 결단으로 하나님나라를 쟁취하시길 소원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나라 사상은 예수님의 주요 사상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고, 교회가 외쳐야 할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하나님나라에 대해 외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나라에 대해 많은 교회들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훈적 설교들은 넘쳐 나는데 진리이신 예수님은 없습니다. 당연히 십자가의 복음도 가리워 졌습니다. 이것은 심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더욱 하나님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경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주에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땅에 모든 종교에서 모시고 있는 신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실 정확히 알 수 는 없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마노아란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는 “기묘자”라고 합니다. 기묘자란 “비밀”이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이름이 뭔지는 비밀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천주교에서 지칭하는 하느님이 옳은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옳은지, 단군을 섬기는 사람들이 말하는 하늘님이 옳은지를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 동시에 아버지와 자녀의 만남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 나간 둘째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째아들이 집을 나갔다 허랑방탕하게 살다 집에 돌아올 때 아버지는 어떤 꾸지람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구 밖에서 기다리며 아들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바로 그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위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처럼 꼭 그 시간에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다니면서 기도할 수 있고, 잠자기전 침실에서도 할 수 있고,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난 사람은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자녀가 칭찬받을 행동을 하면 부모가 칭찬받는 원리입니다. 그런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면 지금 현재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있다면 지금 나는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육신을 입고 있을때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생을 마감하고 육신의 옷을 벗어버릴 때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나라가 나 개인에게 임했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확장 개념으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나온 하늘은 “하늘에 계신” 사용하던 “우라노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에서 사용한 하늘은 “우라노스”의 복수형인 “우라노이스”를 사용해서 하늘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올은 번역 이었습니다.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라고 우리가 부르는 이유는 땅의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전지전능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나온 “하늘”이라는 단어는 단수형으로 “땅”의 반대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의 상징으로 씌여질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이란 명칭을 직접 표현 할 수 없다고 지난주에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하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 6장의 첫구절인 1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쓰고 있고, 오늘 본분인 하늘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주기도문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구지 “하늘”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복음은 그 성경을 읽을 대상이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하늘이란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의 주기도문속에 나타난“하늘”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하늘은 모든 것의 으뜸이라는 인식이 있기에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고대 왕들에게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사극을 보면 왕을 하늘로 비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뜻으로 하늘을 하나님이 거하는 상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거하시는 상징으로 쓰여진 하늘의 뜻은 곳 하나님의 뜻이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40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하나님의 뜻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죄의 결과물로 우리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하루를 사는 것은 하루를 죽은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뜻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했다는 것은 영원한생명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영생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에베소서 3:11에서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있는 우리는 이 뜻안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뜻이 적용될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말씀드리는 것과 같이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선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 하면 우리는 외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선교의 개념은 “문화가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문화속에 있는 모든 곳은 선교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은 문화가 다릅니다. 자매가 많은 집과 형제가 많은 집은 문화가 다릅니다. 이런 문화가 다른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라면 우리는 우리 주변부터 선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오해합니다. 무조건 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부분이 있지만 전부 옳지는 않습니다.
저는 예수전도단이란 선교단체에서 대학교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원때는 인터콥이라는 공격적인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단체안에서 교제했던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한국 속에서의 삶은 선교적 삶이 아닙니다. 전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랑 단기선교를 나가게 되면 그 기간동안은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합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보지 않습니다. 전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선교는 일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삶이 선교적인 삶이 아닌체 방학때 잠깐 선교를 한다는 것은 진짜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는 평상시의 내 삶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이 복음을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 삶에 자리에서 시작해서 온 열방 모든 민족에게 까지 복음이 전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 진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재림하십니다.
우리는 세계선교에는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선교 2위 대국이 되었지만 교회 성도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선교는 해외에도 해야 하지만 나와 다른 가정문화에 살고, 다른 학교문화에 있는 우리 주변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변에서 시작한 선교를 점점 확장해 수도권과, 대한민국과, 아시아와, 온 열방으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교할 때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선교적 삶을 살고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선교적 삶은 전혀 살지 않은체 방학때 선교를 나간다면 그것이 진짜 선교일까요? 우리가 선교적 삶을 살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이루어 지게 해주십시오” 외친다면 과연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할까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 질까요? 누군가는 가서 전해야 합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예수님믿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는 가야 합니다.
이사야 6:8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고 한탄하십니다. 그 물음앞에 여러분은 주님 옆에 친구가있으니 친구를 보내소서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엄청 싫어할 대상이 있습니다. 사단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재림하면 자신이 무저갱에 빠져 끝이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막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막는 방법 딱 하나입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복음전하는 사람을 특히 공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복음전하는 사람을 특히 주목하십니다.
왠줄 아십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단은 더욱 발버둥 칠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고통당할 때 부모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사단의 공격이 강해질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더 빨리 풀어주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고통의 해방의 시기는 예수님이 재림하고 완전한 구원을 이룰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해결 하려면 예수님이 재림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옵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풀어주려면 복음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마음을 쏟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할 때 사단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공격에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는 때 보다 복음을 전하는 그 발걸음과 동행하시고 마음을 쏟아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리는 고난의 자리이긴 하나 축복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이 기도, 선교적 삶으로 복음 전하며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누가 나를 위해 갈꼬 할 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학생선교사가 되어 학교의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정의 선교사가 되어 믿지 않는 나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린시절 사람이 살기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배웠습니다. 입는것과, 먹을 것, 그리고 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먹는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원주민이 나옵니다. 그런데 열대지방에서 사는 원주민들을 보면 옷을 입고 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집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노숙하는 분들을 보십시오. 그분들은 집이 없습니다. 하늘을 지붕삼고 땅을 침대 삼아 살아가십니다. 집이 없어도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원주민이든 노숙하는 분들이든, 우리든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3일을 굶어 담을 넘지 않을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것은 윤리와 도덕이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먹을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의 영혼에 관심이 많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에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육신이 굶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 때 먹을 것을 구하지 않아도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먹을 것을 직접 제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쫒겨난 이후부터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급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동은 하나님의 공급을 거부한 행동 이었습니다. 스스로 살아가겠다는 행동 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더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삶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하게 되니 내가 잘 먹고 살아 위해 나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강자는 더 많이 얻게 되고 약한자는 늘 소외되는 사회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성읍과 탑을 만든 것입니다. 성읍과 탑을 만든 이유를 성경에는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하며 사람을 모았던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어떤 사람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겠습니까? 힘 있는 자들입니다. 힘 있는 자에 의해 세워진 도시는 약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약자들은 힘 있는자에 의해서 늘 짓밟힙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힘 있는 자들이 약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완전한 공급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 먹고사는 문제가 늘 우리의 삶에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아담과 하와가 거부한 행동에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들어가겠다는 결단의 기도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려면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도를 먼저 가르쳐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 의해 에굽에서 탈출시킨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굽에서 탈출해서 40년의 기간동안 지낸곳은 광야입니다. 농사를 지을수도 없고 누군가가 음식을 공급해 줄 상황도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매일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맛나”입니다.
그런데 이 “맛나”는 매일 아침에 먹을 만큼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만약 이틀치를 가져가면 썩어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치를 가져가져가도 썩지 않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맛나”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일용할 양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광야 40년동안 매일매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일용할양식을 통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일용할 양식”은 “병사에게 지급된 하루의 배급량”을 말합니다. 전쟁하는 군인에게 한끼도 아니고 하루의 양식이 끊어져 버리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만약 전쟁터에서 양식이 지급되지 않으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림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모두를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한 사람도 배고파하고 굶어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구상에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구촌 기아와 빈곤의 실태 및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구상은 충분한 먹을거리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자원은 모든 사람이 먹고 살만큼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원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이 불완전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충분한 양식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배만 채우려고 사리사욕을 체우다 보니 한 쪽에서는 굻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2012년10월에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이 8억7천만 명이며, 먹지 못해 저체중인 다섯 살 이하 어린이가 1억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먹을것이 없어서 기아로 하루 사망하는 인구는 10만명, 먹을 물이 없어서 오염된 물을 마시는 인구11억명, 5살 전 굶어죽는 아이인구 1년에 6백만명, 먹고 살기위해 어린이가 노동자로 사는 어린이 인구 2억 5천만명 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지구상 어딘가에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어린아이부터 죽어라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양식이 해결받는 보장은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양식이 분배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 기도할 때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먹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소위 후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청소년중에 돈이 없어서 급식을 해결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늘 일용할 양식을 얻기위해 마음의 전쟁을 펼칩니다. 이런 친구들에게 우리가 다가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었을 때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만 배부르지 마시고 돈벌어서 남주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없는사람을 돕고, 오늘도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의 난민들과, 저 북한의 가난한 자들의 양식을 해결해 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만약우리에게 돈을 주신다면 이런 역할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돈 많은 사람이 없는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채워준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2장에서는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자기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없는 사람의 필요한 것을 체워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사도행전 4장에는 “바나바”라는 사람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밭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돕게 하기 위해 사도들에게 돈을 가지고 온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돈 벌어서 남 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허락하신 것은 나만 잘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물질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굶어 죽어가는 사람 그렇게 많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 한 가족의 하루 식사는 우리나라 돈 500원이면 된답니다. 우리나라 돈 3만원 이면 한 달 생활비를 할 수 있답니다. 저는 우리 청소년들이 이 10대에 세상을 살리는 꿈을 꾸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대학가서 좋은 곳에 취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왕 좋은대학가고 좋은 곳에 취직했다면 나의 포지션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을 살리는데 사용하시길 소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최근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한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저의 딸 하민이 어린이집을 보내야 하는데 하민이가 자꾸 밥을 안먹는 것입니다. 아내는 어떻게 해서든 하민이 밥을 먹이려고 하다가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인것입니다. 높소리를 높이는 정도가 지나치다 싶어서 제가 아내에게 한소리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입니다. 아내는 밥을 잘 먹지 않는 하민이가 걱정되어서 그랬는데, 그런 마음을 모르고 도리어 제가 화를 내니 아내의 마음이 많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저두 사실 밥을 잘 먹지 않을 때 하민이가 걱정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저와 아내도 자식이 밥을 먹지 않으면 걱정되고 어떻게 해서든 먹이려고 하는데 우리하나님은 오죽하실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저는 단순히 먹을것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모든 영역이 해당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에 기본적으로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물질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에 그런사람이 있는 것을 아신다면 그분을 위해 기도하세요.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삶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4장8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라는 선지자를 통해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몸을 파는 자매와 결혼을 하라고 한다면, 또는 몸파는 형제와 결혼을 하라고 한다면 여러분 쉽게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인생에 있어서 결혼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 어디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호세아 입장에서는 사실 매우 힘든 결정이었겠지만, 고멜 입장에서는 사실 많은 것이 회복되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멜이 그 자리를 박차고 다시 음란한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남편인 호세아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자기가 사랑해서 결혼한것도 아닌데 한 인생 구제 하려고 결혼 했더니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고멜을 또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것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이 호세아입니다.
사실 호세아의 입장에서 고멜을 대할 때 마다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키 셨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구해주고 회복시켜 주면, 그래서 조금 살만하면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꼭 우리 같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찾아가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배반할 때 마다 마음이 얼마나 아팠던지 호세아11:8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거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특별히 “내 마음이 내속에서 돌이키어”라고 기록된 원문을 보면 “돌이키다”는 단어는 “속이 뒤집어 진다는 뜻”입니다.
저는 부모가 되면서 저의 부모님이 저를 이렇게 사랑하셨겠구나 깨닫는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민이가 4살이 되면서 더욱 많이 느낍니다. 4살을 미운 4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민이가 미운짓을 엄청합니다. 지난주 주일에 점심을 먹다 하민이가 너무 속상하게 해서 아내가 그만 교회에서 울컥하더랍니다. 그래서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차에 내려 왔답니다. 차에서 너무 속이 뒤집어지고 울화통이 치밀어 막 울었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볼 때 저희 아내가 하민이를 보고 속이 뒤집어져 눈물이 났던 것처럼, 울화통이 치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더불어서 오늘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문장을 원문으로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다음에 “그리고” 라는 접속사가 “카이” 라는 단어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AND”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밥은 매일 먹는 것입니다. 매일 먹는 밥처럼 하나님은 매일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쩔어 있는 죄 짱아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일까요?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까요?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인이 된 우리는 본질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회개를 해도 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 쩔어 있는 짱아치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를 해도 또다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 하면 윤리적인죄 즉, 도둑질, 살인 이런 겉으로 들어난 것을 말합니다. 맞습니다. 이것도 죄이긴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내면으로 지은죄, 즉 미워하는 것, 음욕을 품는 것 이런 것들도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은 죄와 범죄를 구분하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와 범죄를 구분하고 있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내면적인 영역을 다룰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범죄”는 우리의 외적인 부분을 다룰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도둑질을 했는데 들키지 않으면 저는 이 땅에서 범죄자로 낚인이 찍힙니까? 찍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들키지만 않으면 범죄자가 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도둑질 한 제 안에 죄가 없을까요? 죄는 지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난 행위가 들어나지 않으면 범죄자로 낙인찍히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범죄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이 두가지를 통합해서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개념보다 더 근복적인 죄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본문인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문장의 “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옵헤일레마”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의미는 “빛, 채무”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말은 우리 빛을 탕감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관계 안에서의 죄를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주기도문이 기록된 누가복음에서의 이문장의 “죄”라는 단어는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뜻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죄라는 의미의 “옵헤일레마”와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합해보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틀어져버린 모든 것들을 가르켜 죄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이런 기준을 제시했을 때 지난 한주동안 여러분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까? 하루하루를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들을 짓고 삽니까?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저주합니다. 원망합니다. 실제로 입으로 뱉어서 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삽니다. 그 모든 죄에 대해 회개하라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왜 매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사실 예수님의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죄가 해결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나의 매 순간의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나의 죄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리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로인해 죽음이 우리앞에 놓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안에서 죽음을 극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의 빛을 진 것입니다. 생명은 그 어떤 것 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큰 빛을 졌다면 우리또한 다른 사람의 빚과 부채도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사람의 잘못을 싸매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복수를 해줘야 합니다. 나에게 누군가 욕을 하면 나는 주먹으로 갚아 줘야 합니다. 남이 잘못하면 그 잘못을 들쑤시고 다녀야 합니다. 집에가면 엄마와 아빠가 나한테 잘못한 것만 보입니다. 학교가면 친구들이 나한테 잘못한 것 만 보이고 선생님들이 짜증나게 한것만 보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다른사람의 잘못을 덮어주고 싸매주라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1-35에 보면 남을 용서할 때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것은 490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 비유를 한가지 말씀하십니다.
12년간의 국가 예산만큼이나 많은 빛을 진 종을 향해 주인이 그 돈을 이제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종이 자신과 자신의 재산, 그리고 가족을 다 팔아도 그 돈을 갚을 수 없으니 제발 시간을 달라고 애처러운 눈빛을 보냅니다. 그 눈빛을 보고 불쌍히 여긴 주인이 12년간의 국가 예산이나 하는 엄청난 빛을 청산해 줍니다.
잠시후 이 종이 자신에게 100일치 품삭만큼의 빛을 진 동료에게 가서 이제 자신의 빛을 갚으라고 합니다. 이 종에게 빛을 진 동료가 이 종이 주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종은 주인과 달리 자신에게 돈을 갚지 않은 동료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빛을 탕감해 줬던 것처럼 너 역시 저의 동료를 불쌍히 여겨 빛을 탕감해 줘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로인해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살게되었습니다. 생명을 구해 주셨기 때문에 생명의 빛을 진것입니다. 이 생명을 값을 매길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용서 못할 영역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악한 종처럼 나는 용서 받았으면서 다른사람의 잘못을 용서 못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마태복음 7장3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러분 주기도문 첫 번째 시간에 우리는 기도를 하기 전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형제의 잘못을 보고 용서 하지 않고 지적하는 사람은 바로 외식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의 주변사람들이 잘못하면 지적하는 사람입니까? 용서하는 사람입니까? 외식하는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 계십니까?
기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받았다면 매 순간 잘못한 죄가 있다면 회개합시다. 회개는 주일날 예배전 묵상기도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일 공동체 함께하는 예배가 용서받은 기쁨으로, 감사로 드려지게 되는 축제의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동시에 용서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진실한 기도입니다. 오늘 이런 진실한 기도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목사님들과 전국 목회자 축구대회를 나갔다 왔습니다. 축구대회를 나가기 위해 몇차례 연습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연습을 하러가는데 우리교회 부목사님으로 계셨던 김영묵목사님께서 자신의 아들 얘기를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김영묵목사님의 아들은 3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 3 아들중 고양외고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들이 목사님에게 찾아와 죽겠다고 하소연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답니다. 그러자 이 아들이 하는 말이 중학교때는 자기가 제일 공부를 잘해서 친구들이 시험만 끝나면 자기에게 찾아와 답을 맞춰 봤답니다. 그런데 외고를 가 보니 자기보다 공부잘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이제는 자기가 잘하는 친구들에게 가서 답을 맞춰 봐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너무 싫어 죽겠다고 하소연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험은 우리에게 늘 부담입니다. 공부를 잘해도 부담, 못해도 부담인 것이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도 우리에게 부담이지만 영적인 시험역시 우리에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보는 시험이 어렵고 힘들 듯, 영적인 시험 역시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시험이란 교회 다니다 누가 맘에 안들어서 교회를 오기 싫어하는 마음, 전도사님이 나는 맛있는 것 안사줬는데 친구만 사줘 속상한 마음 그래서 교회 왠지 오기 싫고 신앙생활 하기 싫은 마음들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을 넘어서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영적 시험이 어렵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쓰인 시험은 헬라 어 원어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v"(peirasmos)라고 하는데 뜻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1. TEST -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잘 배웠나를 확인해서 사람을 더 성장하게 하고 성숙케 하는 목적
2. TEMPTATION – 유혹을 통해 사람을 망하게 하는 뜻
같은 시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TEST와 TEMPTATION은 전혀 다른의미로 사용되어 집니다.
그렇다면 시험에 들게 하지 않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이것은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은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단이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도 되냐고 물어 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생명만 건드리지 말고 시험하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욥의 인생에는 여러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식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집안은 쫄딱 망합니다. 몸은 몹쓸병이 걸립니다. 욥이 당한 어려움은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인가요? 아님 마귀의 유혹일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시험을 허락하셨고 마귀는 욥을 쓰러트리기 위해 유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험과 유혹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욥의 시련을 통해서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마귀의 입장에서는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현장에는 하나님도 계시고 마귀도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의 사건들이 시험도 될 수 있고 유혹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혹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면 더욱 견고한 믿으로 하나님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사건의 연속입니다. 시험의 연속입니다. 시험들 속에서 주의 뜻을 찾아서 주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유혹에 빠져 죄를 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이었지만 성령께서 이끄셨던 시험이었습니다. 욥과 똑같은 상황을 맏이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기를 원했던 것이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한 준비와 시작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똑 같은 일을 당하고 있지만 두 가지 다른 뜻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과 마귀의 악한 의지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던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유혹을 이겨내고 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요셉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요셉의 신앙은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화를 내야 될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시험과 훈련이 될 수도 있고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벌어지는 일들과 사건들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성장과 성숙이 될 수 있도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 유혹을 넘어가고 시험을 잘 통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시험을 잘 통과 하려면
두 번째,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려고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하고 그것 하나만 제안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유혹할 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립니다. 특별히 사단이 유혹할 때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었을까요? 그것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을 하신 것은 성경에 보면 아담에게만 합니다. 그럼 하와는 누구에게 선악과를 딱먹지 말라고 한 말을 들었겠습니까? 당연히 아담입니다. 말씀을 직접 듣지 않으니 유혹이 오면 확신이 없게 됩니다.
비슷한 상황이 아브라함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75살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이 때 사라의 나이 65세 였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말한 것을 들은 사람은 아브라함 혼자 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라 역시 하와처럼 자신의 남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들은 말씀이 아니라 전해 들은 말씀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년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 하지 못하고 결국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런 여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동침함으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 결과 오늘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이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없다면 마귀의 유혹에 쉽게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무엇으로 이기셨는지를 우리는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사단의 유혹을 이긴 것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확신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혹을 이기고 시험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그리고 자신도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이 땅에 떨어지는 방울 같이 되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도망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버렸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기도해야 마귀를 이기는 힘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도록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 일이 잘되고 평안해지면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태하고 교만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평안할 때 더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결국 매일의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잘 치러서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앞에 온전하게 서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우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관문입니다. 학기 중간에 어느정도 수준의 실력을 갖췄는지 보려고 중간고사를 봅니다. 그리고 학기 말에는 어느정도 발전이 있는지 가늠해 보려고 기말고사를 봅니다. 고3들은 초등학교부터 12년동안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수학능력시험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험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그 때 여러분 시험을 잘 이기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시험을 잘 준비하는 사람은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두렵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시험을 잘 준비하여 시험을 통과하고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욥이 통과했듯이, 요셉이 통과했듯이, 예수님이 통과했듯이 오늘 우리도 통과하길 소원합니다.
친구 때문에, 전도사님 때문에, 선생님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교회 오는 것이 불편하여 시험에 들었던 친구들 있으십니까? 말씀과 기도로 주님 바라보면서 시험을 잘 통과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기도 응답이 된것 두 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살부터 14년동안 가족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33살이 되던 때 둘째 누나에게 문자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나 내일부터 교회 가려고 하는데 성경책이 없다” 마침내 주일에 누나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4년의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 졌습니다.
또 한가지는 지금 저의 아이에 대한 기도응답입니다.
저의 둘째 아이가 태에 있을 때 심장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심장은 심방과 심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심방과 심실은 함께 뛰어야 합니다. 그런데 심방과 심실이 따로 뛰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이가 배속에서 사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행이 버티다 세상밖으로 나와야 치료되는 상황이 었습니다. 배속에서 특별히 취할 조치는 현대 의학으로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아이의 상태만 확인하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주신분도 하나님 이시니, 하나님의 계획속에 아이를 데려가시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하시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다시 거둬가실 분이 아니신 분이심을 믿기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곤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내랑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 졌습니다. 그 아이의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없는데 신기하네요”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아이의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정상이 된 케이스가 있나요?” 그러자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요 저희도 신기하네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저의 삶에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 응답,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여전히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합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밥 먹고 사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밥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매일의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밥을잘먹고산다고사람이행복하고잘사는것은절대로아닙니다. 밥만을 위해서 산다면 돼지와 같은 동물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잘 먹고 사는 것만을 최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내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으면 결국 다른 사람의 밥그릇까지 빼앗아 오는 욕심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짓밟는 현상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가 아닌 우리가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나에게 주신 여분의 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우리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밥과 더불어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사는 곳에는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사는 사회가 따뜻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나눔과배려 그리고 용서와 이해가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뿐만 아니라 날마다 용서하고 이해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험과 유혹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도 계시고 마귀도 존재합니다. 같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더 성장하고 성숙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기도 해야되는 기도의 제목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마지막은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시작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세요”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마칠 때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작과 끝을 이렇게 구성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예배당에서 예배 잘 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잘하는 소위 말하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밥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남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날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자의 삶입니다. 악을 이기고 악한 세상을 바꾸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기도입니다.
“악에서 구하여 주세요” 라는 기도는 “악한 일로부터 구하여주세요” 라는 뜻도되고 “악한마귀로부터 구해주세요” 라는 두 가지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악한 일은 다 막한 마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에서 구해 달라는 이 기도는
첫째, 악한 마귀를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베드로 전서 5:8-9
“깨어라 너희 가 우는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악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입니다. 악은 무섭고 더러운 것입니다. 무섭다고 더럽다고 피하면 절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러나 여러분 악이 더럽고 무섭지만 피해서는 안됩니다. 싸워 이겨야 합니다. 악한 일들 그리고 그 악한 일을 조정하고 있는 악한 자인 마귀와 싸워 이기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절은 산에 있고 교회는 왜 세상의 중심에 있는줄 아십니까? 절은 뭐든지 업보니 자신이 짊어지고 살라고 합니다. 세상과 인연을 끊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바꾸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소금은 무언가를 썩지 않게 할 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둠이라는 말하는 세상을 환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썩어가는 세상을 정화시킬 사람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7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는 세상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인생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서 은혜를 받았으면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만 머물지 마십시오. 세상의 악한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싸우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 은혜 받으셨습니까? 그럼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악한 것들과 싸우십시오.
그런데 악한 것과 싸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두 번째, 사람과 제도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10-18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힘의으로 강건하여지고 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를 입으라 우리의 은 혈과 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의 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를 취하라 이는 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로 너희 를 고 의 을 붙이고 의 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의 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의 와 성령의 곧 하나님의 을 가지라 모든 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를 위하여 구하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악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요즘의 세상을 돌아가는 현실만 보아도 너무나 악한 현실들이 있습니다. 심각한 청소년들의 범죄, 자살. 폭력 그리고 정치인들의 부조리와 경제인들의 부정과 부패들 등 수많은 사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과 눈에 보이는 문제와만 싸운다면 결코 세상은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문제와 싸우다가 좌절하고 낙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입니다.
세상을 악하게 만드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갑춘채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악하니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18-20 입
“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한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들이 젊은이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보고 있는 눈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과 생각 즉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가치관에 악한 영향을 주려고 합니다. 바르지 않은 생각,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생각과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접하는 문화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악한 것들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만 한다고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삶으로 골방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에서도 이루어 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악한 것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악을 이기는 삶일까요?
그럿은
세 번째,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로마서 12:21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하게 산다는 건 착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남는 건 악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워하면 남는 건 미움과 증오밖에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선이 미움과 증오를 이기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드라마 “구가의 서”를 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암시에 걸린 이승기의 친구가 이승기를 두 번이나 죽이려 합니다. 이 암시는 암시를 건 사람이 죽거나 암시를 건사람이 풀어줘야 풀리는 것 이었습니다. 암시가 풀리지 않으면 친구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승기를 계속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승기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런 가족과도 같은 친구에게 가서 자신의 진심어린 마음을 전합니다. 그때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암시가 풀려져 버립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에게 가서 복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이승기는 복수가 아닌 선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다가갈 때 악한 어둠의 암시가 풀어지는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성경역시 말하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살아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착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즘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바보취급 당하고 피해보며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향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은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큰 영향과 충격을 줄 수 밖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이고 개혁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내용의 일부라고 했습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라고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악을 이기고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5장 8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는 말씀이 있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삼키기 위해 늘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를 한번에 넘어뜨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지도 모르게 악한것들로 물들게 합니다. 한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평생을 공들이는 무서운 사냥꾼입니다. 강력한 사단의 역사라면 금방 알아차리고 정신차릴텐데 문제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와서 우리를 악으로 물들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을 이기는 것은 선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으로 악을 이깁시다.
데살로니가 전서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고말하니다.
사단의 공경으로 인한 악을 선으로 이깁시다. 악한 모양을 버리고 선으로 악을 이십시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