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복

8복1. 마태복음 5장1~10 "행복하십니까?"

사람은 두 가지가 만족 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첫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축구스타 기성용과, 텔런트 한혜진씨의 결혼식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힐링캠프에서 한혜진편을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방송 내내 한혜진씨는 기성용선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 졌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기성용선수가 사랑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고 말하며 너무너무 행복해합니다. 한혜진이라는 한 여인을 존재 자체로 사랑해 주는 것을 느끼기에 행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행복을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해 주길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무조건 사랑해 주는 사람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긍극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행복해 합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70~80년대에 청년시절을 보낸 분들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통해 많은 분들이 희생을 했습니다. 박정희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전 대통령이 군대를 이용하여 민주주의 국가에서 힘으로 국가를 이끌어 갈 때 청년이었던 70~80년대의 우리 부모님들은 거기에 대항하며 국가의 민주주의를 실현해 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수없이 많은 젊은분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4.19혁명과, 5.18 광주 민주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건들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부모님세대의 젊은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 들었던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대한민국이 군부 독재를 철폐하고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민주주의 라는 가치가 그분들의 삶의 의미였고, 비록 목숨을 잃어가긴 했으나 그것이 그분들의 행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못할 때는 아무리 좋은 환경에 지낼 지라도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사랑, 삶의 의미가 아니라 돈, 명예, 인기등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행복을 가져달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역의 복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사실 많이 다릅니다. 저는 그것을 “땅의 복”과 “하늘의 복”으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땅의 복 – 돈 잘벌고, 인기누리고, 권력누리고 소위말해 출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 많이 벌고 잘되면 복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 –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출세를 해도 받을 수 있고 출세를 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돈, 인기, 권력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주시는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돈, 인기, 권력 등으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은 이것들을 추구하고, 또 이것들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OECD국가중 가장 행복도가 떨어지는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 가면 갈수록 행복의 참된 길인 “하늘의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복”인 인기, 돈, 권력 등을 추구하는 것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사역 하실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땅의 복”만을 구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2000년전 예수님 당시 “땅의 복”을 구하던 사람들은 병고치고, 귀신 쫓는 등 현실의 문제를 위해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예언 때문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땅의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늘의 복”이 있는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왕으로 오신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땅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이 왕 이되면 한자리씩 하려고 하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땅의 복”을 구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것들로 인해 누가 행복해 집니까?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근심만 늘어나게 됩니다. 땅의 복은 결국 행복과 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땅의 복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2000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땅의 복을 추구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땅의 복을 추구하던 2000년전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기 까지 합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땅의 복만을 구한다면 2000년전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들과 다를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많은 크리스쳔들이 땅의 복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모두 자기 유익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 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데서 근거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 믿는자에게 고난이 올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근거해 나의 유익을 위해 만상형통을 기원하며 기도합니다. 

대학 입시가 가까이 오면 한국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할 것 없이 좋은대학을 위한 특별 기도회가 열립니다. 평소 기도 안하던 부모님들도 특별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독교가 천주교와 불교와 똑같은 종교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대학입시철 똑같이 반응하는 이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성경은 나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죄의 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나 중심적 신앙인줄 아십니까?

대학 합격하면 감사헌금 합니다. 그런데 왜 떨어지면 감사헌금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영성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많이 했는데 대학 떨어졌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며 감사헌금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기도의 사람이고 영성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대학 떨어져서 감사헌금 하는 사람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미국에 있는 좋은 대학 들어가면 간증다니는데, 왜 시골에 있는 대학가면 간증을 못다닙니까? 왜 부끄러워 합니까? 철저히 나 중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복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땅의 복만을 구하는 사람들, 나 중심의 신앙인의 사람들의 특징이 어떤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계속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만족을 계속 채워줄수 있는 왕으로 삼으려 합니다. 나 중심의 신앙을 가진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혼내십니다. 

그런데 그 혼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 중심의 신앙인들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나 중심의 신앙이 결국 “하늘의 복”을 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환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주실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인기와 권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력과 상관없이 서울대 법대 뿐만 아니라 하버드 대학도 보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한 것 중 꼭 필요한 것만 필요한 때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현실의 문제 앞에 놓여있기 때문에 “땅의 복”을 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땅의 복”도 받을 수만 있다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땅의 복” 때문에 하늘의 복“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나 중심의 이기적인 신앙을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면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어 주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하늘의 복”을 경험하고 “땅의 복”까지 경험한 한 친구의 믿음의 고백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까지 11년째 청소년 사역하면서 딱 한명 서울대 보내 보았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박종화 라는 친구입니다. 현제 서울대학교 작곡과 1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이 친구는 고3임에도 불구하고 매주 평일에 2시간씩 시간을 내서 저와 함께 예수님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되어 입시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대를 합격할 기대도 하지않고 그냥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친구 1차를 넘어 2차 최종까지 합격하게 됩니다. 

합격을 한 후 이 친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글을 남겼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최고의 길을 마련해주실걸 믿고 있었기에 떨어지더라도 감사할 생각으로 도전했더니 큰 기쁨을 주시네요..” 

이런 고백은 “하늘의 복”을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다. 

하늘의 복을 통해 진정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땅의 복”인 대학 합격, 현실의 문제인 대학문제를 실패하더라도 감사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의 복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늘의 복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다음주부터 8주동안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산에 올라갔을까요? 마태복음4장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왜 산에 올라가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 계셨는데 그에 대한 소문이 수리아 온 지역까지 퍼졌다고 했습니다. 소문의 내용은 24절에 보면 “병든자, 귀신들린자, 간질하는자, 중풍병자”등을 고친것입니다. 그 소문이 퍼진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아시고 대중의 인기에 머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산에 올라 갔을 때 4장에 따랐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적은 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있음을 5장1절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핵심 가르침인 5~7장의 산상수훈은 끝까지 예수님을 쫒아 산에 오른사람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5장의 시작이 소위말하는 8복이야기입니다. 8가지 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나온 “복”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행복”이라는 의미로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 수많은 문제들로 인한 걱정과 염려들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해 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가르침이 바로 8복의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산에 오른 사람만이 이 행복의 길을 알 수있었던 것처럼 빠짐없이 주일예배를 참석해 함께 행복의 길을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8복2. 마태복음 5장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지난 한주동안 여러분 행복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을 위해 4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1.쾌락 – 먹는거, 보는거등으로 즐거움을 누리길 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행복을 위해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쾌락은 더 큰 쾌락을 원하게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입니다.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마약에 빠진 사람의 삶이 결국 파괴되듯 지나친 쾌락의 탐닉은 삶을 망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먹는 것에 빠지면 성인병이 오게됩니다. 지나치게 성욕에 사로잡히다 성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도 파괴하게 됩니다.

2.명예 – 자신의 이름을 들어내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딜 가든 인정받길 원합니다. 인정받으려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다보니 내면은 공허해 집니다. 
 
3.권력 – 내가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권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여러분에게 이것, 저것하라고 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은 부모님께 밥줘, 돈줘 이것이 권력입니다. 

4.재산 – 위의 3가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 있으면 얻을 수 있기에 재산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연 “쾌락, 명예, 권력, 재산”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정말 행복의 기준이 이런것들이라면 돈 많았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딸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을까요? 왜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노무현전대통령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을까요? 국민할매 부활의 김태원은 과거에 마약을 통해 쾌락을 탐닉하던 시기를 지금 왜 후회를 하고 있을까요? 그것이 결국 행복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쾌락, 명예, 권력, 재산” 이것들이 행복에 일부를 가져다 줄 수 는 있지만 이것들 때문에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조사 했을 때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어느나라인지 아십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쾌락, 명예, 권력, 재산”과 거리가먼 후진국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습니다. 결국 진정한 행복은 이런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행복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왕이 사는 궁전에서 살든, 초막에서 살든 예수님을 모신곳이 어디나 하늘나라 라는 찬양 고백처럼 예수님을 모신 것이 참된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쾌락, 명예, 권력, 재산”이런 것들은 없지만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참된 행복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무조건인 사랑을 힘입고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떤 사람이 마음에 모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일반적 가난의 개념 – 돈, 재산, 재물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
성경의 가난의 개념 – 히(아나임) ->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없는 상태
                      헬(프토코스) -> 완전히 망가진 상태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은 – 내 삶이 완전히 망가져서 스스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 마음이 스스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누군가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첫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습니다. 

눅5:1~8 : 베드로가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잡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 허탕을 치게 됩니다. 허탕을 치고 허무한 마음으로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와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깊은데로 던지라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속는셈 치고 한번더 던져 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일이 벌어 졌습니다. 물고기 잡는것의 전문가인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목수였던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물을 던졌더니 배 두척이 가득하게 잡힌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호칭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주인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은 정말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재의 삶에서, 문제에서 절대로 스스로벗어날 수 없었는데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해결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시한번 가난한 마음으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말한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 질 때 예수님을 그냥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나의 삶을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때부터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가난해 스스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을 때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또 한사람의 이야기가 마15:21~28에 나옵니다.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으니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개 취급하십니다. 이미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함을 알고 있던 이 여인은 자신이 개이니 개들도 주인의 떡 부스러기를 먹으니 떡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인의 가난한 마음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마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의 귀신들림을 고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예수님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여인은 그 어느때 보다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소망이구나 깨닫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어려움을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나의 어려움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의지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째, 겸손한 마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개라고 하는데도 전혀 불쾌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반응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한 자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는가?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 스스로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해 주셨다.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믿으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 다는 것을 믿는 것은 내가 사형 틀에 달릴 만큼의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덤으로 얻은 삶입니다. 우리가 덤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 때 우리는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알고 지내던 학교후배 전도사님인 “서민기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사역을 하다가 너무 무리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저녁에 갑자기 “변이형 협심증”이라는 급성 심장질환에 걸려 심장이 멈추게 됩니다. 급하게 119에 실려서 건대 병원에 가서 조취를 치하게 되었습니다. 심장이 멈추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깨어나도 장애를 갖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틀이나 혼수상태에 있다 깨어났지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이친구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문자 내용을 간추려서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부활의 영광! 14일(주일)이 제 생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태어난 정말 뜻 깊은 날이네요. 아직도 엊그제일이 방금전같은 어지러움은 있지만 조금더 추스르면 철야기도도 가능하겠네요.
이번 기회로 매일 주님 생명값으로 사는 삶을 더 깊이 실제적으로 배웁니다. 깨어나게 하신 주님의 은혜와 계획이 기대됩니다. 내게 맡기실 사명있으신 증거겠지요. 이젠 정말 내 삶이 내 삶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사시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예수! 예수 그 이름이 제게 가장 큰 자랑이요 능력입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생명이 있음은 생명의 주를 찬양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분께 드리는 우리삶 행복한 삶입니다. 기도 감사드립니다.“

덤으로 얻어진 삶이기에 정말 겸손한 표현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사람이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을 극복하게 되니 철저한 겸손의 고백들이 나오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운전을 하다보면 깜박이를 켜지 않고 차선 변경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 심지어 너무 늦게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손가락질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안했을까요? 여러분이 쉽게 예측하시는 것처럼 저도 운전하면서 많은 잘못을 범합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위반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제가 마치 그런 행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위반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운전할 때만 그럴까요? 제가 마치 의로운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가끔만 비난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입을 열어 비난하지 않았더라도 제 마음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복음 앞에서 제 상태를 바라보는 것을 그쳤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서 제가 얼마나 망가진 존재였는지를 잊어버린 거에요. 잊어버린 순간 끈임없이 나는 죄를 짖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무엇이 나타난다고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 앞에 서 있어야 완전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진 의가 얼마나 누더기 같고 거지같은 것인지를 비로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만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교만합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 앞에 서보질 않은 거에요. 한 번도 예배는 빠진 적이 없지만 이것저것 성경공부를 하곤 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 보질 않은 거에요. 만약에 진짜 하나님앞에 섰다면 서민기전도사님과 같은 겸손한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말은 완전한 가난과 궁핍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가난, 완전한 궁핍,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자신을 도저히 의롭다고 여길 수 없는 사람,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그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하디 가난한 마음을 가진사람이 왜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까요? 그런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셋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종선씨가 지은 “따뜻한 카리스마”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통 상대에게 주는 상처는 흔히 겸손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된 말 한마디나 별 뜻없이 한 행동 하나인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부터 누누이 들어왔고 누구나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우리 모두 아는데도 겸손이 여전히 최대의 미덕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모습이 대부분 겸손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내용을 보면서 마음 찔리기 시작했습니다. 꼭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주님처럼 겸손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죠?’ 왜 안 되는 것일까요?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통치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고 내가 나의 주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절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이 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자신의 상태가 선한 것이 하나 없는 철저히 망가진 상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가 있어야 함을 아는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복이 무엇이에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에서 ‘∼이다’라는 단어 ‘에스틴’은 미래형 동사가 아니라 현재형 입니다. 즉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은 미래에 경험할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미 현재에 임한, 그래서 날마다 경험할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심령이 망가졌던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오늘, 그리고 매일, 날마다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자신의 심령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가난해진 사람, 자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고 겸손하게 살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셔야 순간순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의를 들어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며 겸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 삶의 각 영역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야. 

그래서 심령 즉,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마커스 워십의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라는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오늘은 이 찬양을 하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x2)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8복3. 마태복음 5장4장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남자는 태어나면서 3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한번 울고, 나라를 잃었을 때 울고,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눈물이 진짜 많았습니다. 지금도 너무 속상하면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웁니다. 그런데 괜히 울고 나면 창피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모르게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유명한 미술치료사이자 화가인 루시아 카파치오네는 그의 책 “감정치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화, 슬픔, 우울, 두려움 등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행복한 얼굴로 덧씌우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 감정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아파해야만 진정으로 행복과 사랑, 기쁨, 그리고 평화와 같은 더 긍정적인 감정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눈물 흘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한바탕 울고나면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 수그러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는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체면 문화 때문입니다. 체면문화는 슬퍼도 슬프지 않는 것처럼, 식사 했냐는 물음에 배고파도 밥 먹었다고 하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칩니다. 내 속을 남에게 들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에 한이 많아 졌습니다. 

한이 워낙 많다 보니 자신의 감정, 슬픔 등을 표현할 방법을 생각하다 만든 것이 바로 “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창을 들어 보시면 내용이 어떻든 간에 굉장히 슬픔니다.  
창을 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행복해 지려면 체면문화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을 주저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한 만 쌓일 뿐입니다. 남자도 슬프고 속상하면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다고 심리 치료사인 “루시아 카파치오네”도 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본문을 통해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애통이라는 단어는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 “펜테오”라는 단어를 씁니다. 
펜테오 - “고통에 모부림치며 가슴에 스무치는 깊은 슬픔”

우리 부모님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님 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의 딸은 이민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어령교수님의 딸인 이민아목사님께서 암으로 얼마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최고의 아픔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픔을 경험한 이어령 교수님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이어령 교수님이 그 아픔을 회상하며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솔직한 얘기로 크리스쳔으로서 딸을 잃으면 하나님 곁으로, 고통을 피해서 갔으니 얼마나 편하겠는가, 축복받았다 하고 울음을 멈춰야 되는데, 저는 믿음이 약해서인지 딸이 죽고 나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이런 딸을 잃은 고통을 표현한 이어령 교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가 “펜테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떨 때 “텐테오” 즉, 고통에 몸부림치며 가슴에 사무치는 깊은 슬픔에 잠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이 있을때 슬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지 50일이 지난날 사도행전 2장에는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곳에 있던 150명의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으니까 기도를 엄청 크게 한 것 같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기도소리를 듣고는 술 취했다고 놀려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그 시간이 오전9시임을 감안하며 아침부터 술을 취했다고 조롱하기 까지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갑자기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들 때문에 죽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다윗의 후손이다. 그 다윗의 후손이 너희들의 죄를 대시 지시기 위해 아무 흠도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며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합니다. 왜 그들이 애통해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라는 사형틀에 당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져야할 사형들인데 예수님이 지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라 일컫는 사람들에게 이와같은 애통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며 “내가 어찌할꼬” 애통해 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돈 없음에 애통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녀 진로문제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놓고 애통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실때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울지 말라고 합니다. 울려거든 너희들의 영혼을 위하여 울라고 합니다. 영혼의 문제를 놓고 애통해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너희 안에 생명이 있는지 영혼의 상태를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보고 자기의 한계를 봐야 합니다. 자기의 한계를 보고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을때 베드로는 분개했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죽을지언정 배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자신만은 절대로,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을거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그것도 작은 여종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초라 했을까요?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나 진짜 주님 사랑하는데 내 인생이 안되는구나, 나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데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되는구나. 여러분 이것이 우리 삶에 없으면요 애통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삶을 보호 할 수 없다고 깨닫고 무너질 때, 내 힘으로는 도저히 내 삶을 통제 할 수 없구나 깨닫는 그때 우리는 애통하게 됩니다.   

내 삶에 여전히 믿을 구석이 있고, 내 삶에 여전히 나로인해 가능성을 보고 있다면 어떻게 주님이 구원자가 되겠습니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베드로의설교를 듣고 자신의 삼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보고 애통해 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우리가 어찌할 꼬 물을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자신이 그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며 애통할 때

둘째, 자신이 걷고 있는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의 부유층에 위치한 지도자 였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칭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쌩뚱맞는 소리를 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에 대해 묻고 싶어서 갔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 말을 꺼내기 그러니까 예수님을 칭찬 했것입니다. 

그런데 칭찬의 내용을 보면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다”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행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판단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판단의 주체가 내가 될 때 거기서부터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든 삶의 기준이 내가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벗은 것을 알게 됩니다. --> 판단의 기준이 “나”
벗은 것을 보고 나뭇잎을 따서 가립니다. --> 행동의 주체도 “나”

영어로 죄를 “SIN”이라고 합니다.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I”가 있습니다. 내가 나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나 중심의 모습이 니고데모에게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올 자가 없다”

거듭나다는 말은 “죄의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듣고 거듭납니다. 실제로 요한복음3장에는 거듭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낼 때 두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그 중의 한명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고, 나머지 한명은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민족의 원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장사를 지냈다는 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회개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와 같이 삶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원어로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잘못된 삶의 과녁에서 돌아오는 것 이라고 합니다. 즉 삶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돌이킨 이유가 무엇 이었습니까? 민족의 원수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장사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걷고 있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고 죽음을 무릎쓰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받기 원하고, 행복해 지기 원하지만 성경에 말하는 기본적인 원리인 회개의 원리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나중심이 아닌 하나님중심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게 텐테오의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며 회개 하는 사람을 향해 오늘 본문은

셋째, 위로를 주실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신 내용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사로의 가족인 마리와 마르다는 애통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슬퍼하고 애통하며 텐테오의 슬픔에 빠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실 슬픔이 있을 때 온갖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사람으로 최고의 위로는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위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시지만 완전한 하나님 이십니다. 함께 울어주실 뿐만 아니라 나사로를 살려 주심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완전한 위로를 안겨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아픔에 함께 참여 하며 함께 텐테오의 슬픔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도 위로의 소망을 알게 하셨습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 이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책 “행복”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산통이 있어야 출산이 있듯이 죄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영적 거듭남이 있다.” 

그러나 이어서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은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발견하는 죄 때문에 울게 되리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대한 슬픔은 조용하게, 거의 또는 아무 느낌 없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발견하는 악에 대한 진지한 슬픔, 도움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결단은 있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죄로부터 돌이키는 결단, 즉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이키셨습니까? 자신의 죄를 보고 통곡하는 그 자리에서 이제 돌이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고 계십니까? 매일 매일 주께 더 가까이 갈수록 보여 지는 모습, 날마다 범죄 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애통하고 계십니까? 나를 볼때 절망이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돈이 있어도, ,권력이 있어도, 인기가 있어도, 모든것을 다 갖췄어어도 하나님이 없이 돈에 의미가 없고, 권력에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애통해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 애통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위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위로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 생활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 앞에 나왔지만 이곳에 온 사람들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한계 앞에 애통해 하지 않는것, 그것이 진정한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8복4 마태복음 5장5절 "온유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도위를 걸은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간디는 성경책을 들고, 연설에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좋게 여긴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간디의 모습을 보고 어느날 선교사님께서 간디에게 찾아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간디에게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이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법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질이 고약하고 제멋대로인 강자지도 책에서 말하는 대로 훈련시키면 양처럼 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순간, ‘남편을 이렇게 길들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의 성격이 너무 포악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책에 있는 대로 남편이 조금만 잘해도 크게 칭찬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으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또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 주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남편이 온순하게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얼마후에 남편이 이 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믿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남은 변화시키려 부던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온유는 사실 조금 다릅니다. 

온유 – 헬 : 프라에이스
        -> 말중에 가장 좋은말을 적토마라고 한다. 이 적토말은 처음에는 아무도 통제하              지 못하는 야생마이다. 그런데 이 야생마를 훈련시키는데 피리를 불면 자신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주인에게 돌아 올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다. 그런데 이 야              생마를 최고의 말로 사용하기 위해 마지막 통과 시키는 훈련이 있다. 훈련을 위해               먼저 말을 3일 굼긴다. 물도 안먹인다. 그러나 멀리서 말이 보일 수 있도록 물              을 준비한다. 그러면 모든 말이 그 물을 먹으로 간다. 그 때 훈련을 시키는 교              관이 피리를 분다. 이 때 피리소리에 훈련되어진 것을 그대로 반응해 목마르고              죽을 것 갖지만 물로가지 않고 주인에게 돌아오는 말을 주인이 선택해서 최고              의 말로 사용한다. 이 때 쓰는 단어가 “프라에이스”, 즉 온유라는 단어다. 

즉, 주인에만 단련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젠틀한것과 다릅니다. 부드러운것과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바른 것은 바르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순히 부드럽고 유한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힘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온유함을 통해서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사람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한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온유해 질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온유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지난 두시간동안 함께 나누었던 “심령이 가난해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함 – 내면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이기에 외부로부터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
애통하는 자 –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고통하며 신음하는 상태

이것을 깨닫고 인정 할 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진실로 믿은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기에 더 이상 거친 야생말과 같지 않고 주인의 다스림을 받는 명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스림이 있는 하나님나라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동화작가 정채봉씨가 쓴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옷걸이들 간의 대화”가 나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합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뜬 끔 없는 충고에 새 옷걸이가 묻습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그러자 헌 옷걸이가 새 옷걸이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한 방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제가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옷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망가져 사용할 수 없었던 옷걸이였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니 교만해 진 것이지요. 온유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만 보고, 내 자신의 죄와 허물이 보지 못했던 것은 내 본질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본질은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의 본질은 죄인입니다. 죄인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 받았기에 우리가 잊어 버린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니 우리는 교만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만해 지닌어떻게 온유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늘 인식한 사람은  

둘째, 언제나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삽니다.

사실 온유하게 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바보처럼 살라는 것 같아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순진한 애가 밖에서 매라도 맞고 돌아오면 얼마나 속상해요. 그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잘 맞았다. 너는 다행히 때리지 않았지? 오른 뺨 맞을 때 왼 뺨도 돌려댔니?” 이렇게 말씀합니까? 아니요. “너는 손 없어. 걔가 때리는 동안 넌 도대체 뭐했어? 너 바보야! 멍청하게 왜 맞고 다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가정이든 학교이든 직장이든 우리가 어디서든 쉽게 듣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강해야 산다는 것입니다. 힘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본주의 양육강식의 논리와 반대로 말씀합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 너무 억울하다. 그렇게 사는 것은 바보 천치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피해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감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온유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남이 나를 한 대 때리면 두 대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원래 내 성품 이지만 하나님앞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냥 말씀안에서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인내의 결과는  

샛째, 땅, 즉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아티클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니까 다른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가던 야채집 사장님을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펑소에 가던 야채 집이라 야채집 사장님은 이분이 기독교인 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도하러 가서 이분이 막상 전도를 하려 하니 말문이 막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야채만 사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야채를 사는데 제일 시들하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야채들만 골라서 산 것입니다. 

몇칠 후 이분과 같은교회를 다니던 분이 그 야채집에 와서 이분과 똑같이 제일 시들하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야채들을 골라서 사간 것입니다. 그 주에 야채집 사장님과 가족들이 그분들이 다니는 교회에 등록했답니다. 

먹는 것에 있어서 잠깐의 피해가 있었지만, 그 피해로 인해 새로운 영혼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채집 주인은 마침내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 다는 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 받았다면 야생마처럼 내 마음대로 살던 삶, 이제는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바라보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바라보았던 세상처럼 우리가 세상을 볼 때도 우리는 작아 보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우리는 10명의 반열이 아니라 이시대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땅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나라를 살수 있습니다. 비록 조금 가난하게, 다른사람에게 조금 피해를 보더라도 하나님나라를 살기 때문에 참된 평화의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타인들도 하나님나라에 들어오게 될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철저히 길들여지지 않으시겠습니까? 


출애굽기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430년의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내용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탈출은 했지만 하나님이 이들에게 긍국적으로 주시고자 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온유하지 못해서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집트 탈출전에 10가지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라는 음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때에 따라 물을 주시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메추라기도 주셨습니다. 그만하면 하나님께 길들여 질 때도 되었는데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서 전혀 길들여 지짖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12지파는 한 지파에 한명씩 대표를 선발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 지파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들은 당시 2M가 넘는 등치 큰 사람들이 모여사는 국가 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10명의 사람들은 세상의 논리구조로 굉장히 옳은 말을 했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싸우면 당연히 어른이 이긴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자본주의 논리구조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이길것이라는 서바이벌 논리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광야에서 2년을 넘게 하나님의 인도와 훈련을 받았지만 하나님께 훈련된 온유는 없고, 여전히 세상의 논리구조만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지난 2년동안 이집트 탈출 과정과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프라에이스”로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정탐을 마쳤습니다. 그런 그들은 10명과 달리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그들은 2M가 넘는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 결과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간 1세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연단되어 하나님의 사람이된 온유의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8복5. 마태복음 5장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합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아프리카 난민을 구하던 봉사단들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봉사단들이 교육비가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의 집을 방문해보면 안테나가 있고 DVD플레이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도 없다면서” 어떻게 TV가 있는가 하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먹는 것보다 저게 더 중요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 입니다. 집이 없으면 노숙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옷이 없으면 나뭇잎으로 라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으면 우리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 보다 TV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가장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방촌에 가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집에 TV가 있고, 집에 있는 동안 TV를 틀어 놓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삶에 필요한 많은 부분들이 부족 하면서도 실제로 돈이 생기면 모아두었다가 텔레비전을 사는 빈곤층이 더 많다는 것은 사람은 분명 빵 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빵만으로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빵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빵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참된 행복은 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배부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빵을 훔쳐 배부른 소년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빵을 훔쳐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빵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배부름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행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바로 의로움이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지난 목요일은 우리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광복을 한 광복절 이었습니다. 광복절을 맞아 tv프로그램에서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그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원한다”

한 할머니는 사과를 하면 70여년동안 가슴에 안고 있었던 응어리가 풀릴 것 같다고 눈물을 흘리시며 얘기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죄의 고백을 통해 의로워 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를 갈망하지 않는것입니다. 

“의”라는 단어는 –(헬) 디카이오쉬네 :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란 뜻입니다. 

의를 갈망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니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했던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을 받아들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스포츠에서 한일전을 하면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 하는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도 마찬가지입니다.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에게 지배 당했던 수많은 국가들이 전혀 의를 갈망하지 않는 일본을 향해 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게 항의하는 모든 국가들은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과거 자기 선배들의 죄를 고백하고 의로워 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죄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 다시말해 하나님이 받아들일만한 한태가 되는 것은 죄를 돌이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가 의로워 지려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에서 돌이킬 때 의로워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하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좀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자신 안에 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덩달이 시리즈가 있습니다. 한번은 국어 선생님이 초등학생들에게 “먹다”의 과거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학생이 “먹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덩달이만 혼자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먹다’의 과거형은 ‘배고프다’입니다. 배고파야 먹지요” 

이 썰렁한 유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배고파야 먹고자하는 갈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의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본인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갈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리고 목마르다,’ 이 말은 단순히 배고픈 상태가 되었는 말이 아닙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라는 유명한 설교자는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태가 되며,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궁극적인 도움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절망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집나간 둘째아들 탕자가 그랬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허랑방탕한 삶으로 다 탕진합니다. 그 이후 단순히 육체적인 배고픔 때문에 남의 집에서 돼지밥을 훔쳐 먹습니다. 돼지밥을 훔쳐먹다 이제는 그것도 못먹을 처지가 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모면서 자신이 내세울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음을 인식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자신이 내세울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임을 인식할 때 탕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갈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배고팠을 때 그는 돼지밥을 찾았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돼지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존재일 때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는 열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려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 그냥 한번 돌아가 볼까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그제서야 느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가끔 느끼는 부족함이 아니라 내 속에 의가 하나도 없어 하나님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습니까? 그런 절박함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의에주리고 목마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둘째, 일시적 만족을 주는 세상의 쾌락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성경은 의인이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저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들이 자신 안에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시적 만족을 주는 세상의 쾌락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행객이 해안지방을 지나가다가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청정했으며 갈매기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기에 분명 예사로운 죽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를 치우고 있는 한 노인에게 죽음의 원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해마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과자와 사탕 등 먹이를 많이 주지요. 하지만 그것은 갈매기들에게 해로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갈매기들은 그렇게 맛있는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연 먹이에 대한 맛을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그리고 철이 지나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바다 속에 있는 수많은 자연 먹이를 놔두고도, 여행객들이 주는 과자와 사탕을 기다리다 결국은 굶어죽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자신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탕자처럼 주려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tv가 주는 오락프로그램의 즐거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찾는 것 보다 오락프로그램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컴퓨터게임이 주는 쾌락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보다 오락이 더 즐겁습니다. 순간적으로 주는 쾌락과 즐거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영혼이 메말라 비틀어 죽게 되었음에도 의에대한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들일만한 상태인 의로운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면 그저 시대에 뒤떨어지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만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좋기 때문입니다. 세상 쾌락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합시다. 관광객들이 주는 사탕과 과자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갈매기와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기 원한다면, 주려 죽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세상 쾌락을 중단해야 합니다. 

오락에 미쳐있는 것을 멈추세요, tv프로그램에 미쳐있는 것을 멈추세요, 성에 미쳐있는 것을 멈추세요. 청소년시절 성에대한 호기심으로 요즘 청소년성범죄가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성에 대한 집착으로 성에대한 갈망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자매들을 더듬습니다. 고려대학교의 한 교수는 여학생들을 몰래 촬영합니다. 잘못된 성에대한 개념으로 생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부부간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안에서 성을 오픈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앞으로 연예할 텐데 스킨십에 갈망하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잘못된 성에 대해 갈망하지 말고 오직 의를 향해 갈망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오늘 본문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쾌락이 참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셋째, 하나님만이 참된 만족을 신다는 것을 게 됩니다. 

본문 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누가 배부른 인생,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특별히 ‘배부르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르타조’인데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만큼 만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을 채울수 있기에 하나님만을 찾는 사람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만족시키는 참된 양식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리는 참된 음료이십니다. 만약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세상을 기웃거리며 순간적 만족을 주는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로인해 참된 양식이 바다 속에 풍성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객들이 던져주는 사탕과 과자를 기웃거리는 갈매기처럼 주려 죽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토미테니라는 사람이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이 이 책에서 고백한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그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배고파하지 않는 것, 굶주림이 없는 곳에 그분은 성령을 부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갈급한 자를 찾으십니다. 갈급함이란 기존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께 넘겨 드릴 준비가 되었을 때, 그분은 그때 오십니다. 우리에게는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급함이 있습니까? 의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의, 그 의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 죽을 것 같은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그 목마름, 그 굶주림을 상실했다면 우리의 영혼은 분명히 병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목마름이 있다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이 체우시는 은혜로 배부르게될 것입니다. 그런 목마름이 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하듯 영혼의 참 행복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8복6. 마태복음 5장7절 "긍휼히 여기는 자가 행복합니다" 

지하철에서 장애를 가졌다고 인사를 하고 문서를 나눠 주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길에서 멀리서 왔는데 차비가 부족하다며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도와 달라는 그분들을 보면서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긍휼한 마음을 갖어야 합니다. 

긍휼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걸인에게 천원짜리 한 장 적선해 주거나, 방송에서 불쌍한 사람이 나오면 ARS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첫째, 긍휼이 필요한 자와 같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긍휼은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이Compass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파티 쿰”에서 파생된 말로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을 원어로 보면 “긍휼”이란 단어를 헬라어 “엘레오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의미는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 사람의 삶속으로 뛰어들어 그를 돕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사마리아 사람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있는 지역에 일을 보러 걸어가던 세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오늘날 목사님들과 같은 제사장, 두 번째 사람은 오늘날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격인 레위인, 세 번째 사람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왕땅당하는 사마리아인 이었습니다. 이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도 강도를 만날까봐 사람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사마리아인은 그 비참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자신도 위협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속에 뛰어들어 그들 돌보아 줍니다.“엘레오스”의 마음이 있었던 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께서 “누가 강도만나자의 이웃이냐?”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선한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은 율법교사 역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타인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아픈자와 함께 아파하고, 슬픈자들과 함께 슬퍼해 주는 “엘레오스”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실한 믿음을 가진자의 태도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아픈자들을 보고, 슬픈자들을 보며 여러분은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동정만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함께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까? 아픈자들과 함께 아파주고, 슬픈자들과 함께 슬퍼해 주는 “엘레오스”가 여러분 안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과 죄중에 있는 타인을 긍휼하게 대해야 하지만

둘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을 긍휼히 여길 때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아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죄에 찌들어 망가질대로 망가진 우리 인간이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욕을 먹고 있는 직업을 가진 그이기에 친구하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굼해 하며 올리브 나무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이 삭개오의 눈과 마주칩니다. 눈을 마주친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삭개오의 집에 가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삭개오가 사는 집에 가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리로 돈은 많았지만 그 어떤 친구도 없고, 사회적으로 책망을 듣고 살며,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그의 삶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삶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회개의 삶으로 자신이 세리로 착취했던 돈으 모두 돌려주고, 자신이 가진돈을 자신과 다른형태의 긍휼이 필요한자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벧전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홀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홀을 얻은 자니라”

우리는 죄의 결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를 “엘레오스” 하신것입니다. “비참한 상태에 빠진 인간을 불쌍히 여겨 우리의 삶속으로 뛰어들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에 우리가 당해야 할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했기에 우리의 삶에 뛰어들어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통해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만 우리는 진정한 “엘레오스”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삭개오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엘레오스의 긍휼을 경험했기에 자신도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 엘레오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엘레오스”의 삶을 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셋째,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체험, 즉 하나님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자존심을 세우며 마치 자신들은 긍휼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에게 신세지기도 싫고, 누구도 돕고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 할 일 내가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삽니다. 소위 나만 잘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굴에 점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점이 몇게인지 세 봐야겠는 생각이 들어 씻다 말고 거울에 가까이 가서 점을 세봤습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점이 무려 40개가 넘게 있었습니다. 점을 보다 제가 순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은 거울이구나, 그 걸울에 가까이 갈때만 내 진짜 모습이 들어나는 구나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를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서면 설수록 우리의 죄악된 부분이 더 구체적으로 낫낫이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과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죄악된 나의 모습이 낫낫이 들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서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하니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통해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 잘하면 인생이 잘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23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책을 쓰신 몽골 선교사님으로 계신 박관태 라는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의료 선교를 하시는 분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라면 사회적으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이런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몽골로 갔습니다. 이분이 왜 대한민국에서 복음전해도 되는데 몽골로 갔을까요? 

몽골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박관태선교사님이 처음부터 몽골을 사랑하신 것은 아닙니다. 몽골에 들어간지 넉 달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사역을 정리하는 연세드신 선교사님의 마지막 당부 때문에 몽골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연세드신 선교사님의 당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일을 하고 구제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선교후원을 받는다는 부담과 사역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몽골에 있는 동안 몽골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 남아 있는 여러분은 부디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국내로 귀국하기 전 늙은 선배 선교사님의 마지막 당부를 들은 박관태선교사님이 유언과도 같은 그분의 말이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자신 안에 몽골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하는데 놀랍게도 그때 선교사님의 마음에 긍휼을 부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앞에 설 때만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2:4~5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 구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이 없었다면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을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구원받았다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세계적인 문학가인 톨스토이가 어느날 길을 가다 걸인을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구걸을 하는 그 걸인에게 나누어 줄 돈이 있나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불쌍한 그 사람을 돕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주머니에 돈이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안 톨스토이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을 빼 걸인의 손을 잡아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합니다.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걸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돈을 받을 수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던 따뜻한 마음을 처음 느낀 것입니다. 자신을 동정하며 동전이나 던져주던 사람들과 차별된 따뜻한 사랑을 톨스토이를 통해 느낀 것입니다. 

두주전 교회에 와서 쌀을 달라던 그분에게 단돈 10000원을 안겨드리며 저역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가진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곤 그분의 상황을 들어 드리고 그분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그분의 아픈곳에 손은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마치고 눈을 떠보니 60이 다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어린아이같이 울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원하는 것은 쌀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오는 진정한 긍휼과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것 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역시 그렇게 긍휼과 사랑에 목말라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닙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쌀을 원하시던 그 어르신과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사랑과 긍휼로 대하던 그 어르신과 헤어진 뒤 저의 마음은 그 어느때 보다 행복햇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도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시겠구나를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통한 긍휼로 구원받았다면 이제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긍휼히 여깁시다. 그럴 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8복7. 마태복음 5장8절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역사상 최초로 달에 갔다온 사람은 “제임스 어윈” 이라는 사람입니다.  “제임스 어윈”이 헝가리의 한 대학에 가서 우주여행을 한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소위말해 간증을 한 것입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질문했습니다. 

“소련의 우주인들은 달에 갔다 와서 아무리 찾아봐도 하나님은 안보였다고 하던데 당신은 어떻게 그 우주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제임스 어윈”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차이가점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태양을 선글라스나 특별한 도구없이 똑바로 쳐다볼수 있습니까? 불가능 합니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관측할 수 있는 특별한 도구를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눈이 상하게 됩니다. 

태양이 그정도인데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은 어느정도일까요? 직접 보면 눈이 먼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게됩니다. 이것이 창세기3장의 에덴동산의 죄악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1절에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것과 교회 다니는 것은 별게 문제입니다. 교회 다녀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닐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다니면서 진실한 믿음을 가진사람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늘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하신지 오래되셨는데 현재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으셔서 답답하십니까? 매일 큐티를 빼먹지 않고 하는데도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를 경험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이 청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보고 경험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도, 장로님도, 교회에서 십일조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보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고 십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이 청결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먼저 우리의 마음이 부패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 8절 보세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성경은 행동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닌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예수님께 질책을 당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들어난 행동은 정말 깨끗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썩어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같다고 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사람을 장사 지낼 때 동굴에 넣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공굴에 시체를 넣고 뚜껑을 닿아 뚜껑 주면에 시멘트유사한 물질들을 발라서 밖에서 보았을 때 매우 깨끗하게 무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속을 열어보면 시체가 썩어서 너무나 부패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패한 상태의 내면을 가진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겉모습은 그럴싸 하지만 내면은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모습을 지적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교회에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제일 힘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의 행동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늘 다른 사람보다 자신들이 우월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여지는 외형은 그럴싸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에만 치중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행동이 깨끗한 사람이 아닌 마음이 청결한 자가 진정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청결함이지 가식된 행동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마음이 청결해 져야 하는 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5장 19절을 보세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음이 온통 더러운 것으로 망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아이들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아이들에게 나쁜 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꺼 빼앗아 가면 때립니다. 

이런 인간의 죄악된 마음을 알았던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잘못된 사람들인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미워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러면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나는 다르다고 착각하는 우리, 그렇게 우리의 실제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원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 지 먼저 보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로인해 우리가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마음이 청결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마음이 청결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청결”은 헬라어로 “카타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니다. 이 단어는 보통 다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첫째로 깨끗이 세탁한 옷을 의미합니다. 둘째, 100% 순금이나 순수한 물을 의미합니다. 셋째, 돌이나 티를 골라낸 순수 알곡을 말합니다. 넷째, 빚진 것을 다 갚고 자유로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죄로부터 자유 함을 누리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아 마음이 나눠지지 않은 상태, 즉 죄에서 완전히 자유 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으로 완전히 채워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마음이 청결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빌립보서 3장 5-6절에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자신은 완벽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로마서 7장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또한 로마서 7장 19~21절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율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완벽했던 바울이, 지금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자신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청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가 없이 100% 깨끗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로마서 8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만이 우리는 청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십자가에 나의 부패한 자아를 못박을 때 그때 청결해 지는 것입니다. 그 청결함이 있을때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청결하게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셋째,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서야 합니다. 

요한1서 1장 9절 보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믿는자들에게 씌여진 성경입니다. 즉, 믿는자도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시다는 말은 죄를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우리가 믿고 있지만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부패한 자아를 못박아야 합니다. 말씀앞에 진실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 “마음의 혁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년 전 전국적으로 유명한 남부 캘리포니아의 세 목사가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 몇 주에 걸쳐 대중에 발표되었다. 소위 ‘뉴스’거리다. 그러나 문제는 결코 섹스만이 아니다.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허영심, 이기주의, 적대감, 두려움, 무관심, 노골적 비열함 따위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마음의 혁신, 청결함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청결한 마음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죄를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게 살았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후에도 죄를 행하고자하는 자신의 비참한 죄성을 날마다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오직 청결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보고 계십니까? 말씀을 보고 큐티를 하는데도 죄가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는 순간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모습만 보입니까?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는 데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 그런 우리가 깨끗해진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청결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구하는 방법외에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 청결케 될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만 있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청결케하기위한 단 하나의 방법도 없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주님앞에 날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아파하며 하나님께 자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청결함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오늘날 대한민국 기독교의 자화상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목사의 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개인의 욕심을 체우기 위해 사유화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성범죄와 사기 행각등으로 실제 감옥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권력을 이용해 시민들이 함께 걷고 사용하는 인도를 침범해 교회를 지으려 합니다. 그러고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대형교회를 가기위해 박사학위를 허위로 취득합니다. 

목사님들 이지만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윤리수준이 가장 높은 집단이 되어야 할 목사님들도 이렇게 일부 청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데 우리는 오죽할까요?

늘 죄악된 생각들로 넘쳐날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속에는 이런 죄악된 생각들이 끈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죄책감에 사로잡혓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힘으로 청결해 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전적 의존합시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케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놀라운 자유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는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보이지 않으신다면 우리 이시간 기도합시다. 주님 나에게 청결함을 주옵소서.




8복8. 마태복음 5장9절 "참된 그리스도인은 화평케합니다. 

우리나라의 갈등지수는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갈등지수는2005년 통계에 의하면 OECD 회원국 가운데 터키, 폴란드, 슬로바키아에 이어 4번째로 높다고 진단을 했습니다.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갈등으로 인해 지불되는 사회갈등비용을 계산해 보니까 국내총생산(GDP)의 27%인 약 300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이 산정되었습니다. 좀더 쉽게 말해 사람들이 서로 싸워서 서로 물어준 돈이 1년에 300조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달 통계가 다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갈등지수가 이제는 2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왜 세계에서 2번째로 서로간의 갈등을 많이 일으키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300조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 복지를 할 수 있는 수준인데 어쩌다가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된 이유를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어떻든 역사적으로 서로가 갈등이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의 갈등지수는 세계 2위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안좋은 것은 다 상위권입니다. 이혼률1위, 낙태율1위, 자살률1위, 여기에 더불어 갈등지수 세계2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혼은 부부가 갈등으로 생긴 것입니다. 자살률 역시 주변과의 갈등이 상당한 영향을 줍니다. 낙태도 보면 부적절한 관계로 갈등을 일으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갈등이 사회에 많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 갈등이 많이 일어나는데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은 정책탓, 조상탓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갈등지수가 세계 2위가 된 이유를 우리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화평케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정치가나 시민운동가가 아닌 바로 그리스도인이 화평케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학교의 우리 반이, 우리 가정이 화평한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저와 여러분이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화평케 하는 자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지어 화평케해야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조차도 늘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금만 의견이 다르고 상처를 입으면 서로 인사도 잘 안하고 원수처럼 지내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교회갈등의 성경적 해결방법”이라는 책이 다 나왔겠습니까? 

교회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당연히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을 풀어내는 능력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의 시초가 되었던 곳은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 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뜻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 교회는 평화의 터전위에 세워지는 곳 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터전에서 세워진 교회에서 갈등을 풀고 평화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둘째, 평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분은 폴란드의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입니다. 노벨 평화상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벨평화상을 받은 “레흐 바웬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아들을 호되게, 정말 있는 힘을 다해서 호되게 두들겨 팬 적이 있는데 날짜를 따져 보니까 바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통보 받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이라면 화도 안낼 것 같은데, 그 사람도 자신의 가정에서조차 화평케 하는 자로 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59장 8절에 보면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참된 평강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만나기 전에 마음속에 평강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상관없이 평화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대한민국과 북한의 평화롭습니까? 겉으로 들어나는 모습은 휴전이후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북의 군인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총을 겨누고 있습니까? 평화로워 보이지만 참된 평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때 대통령후보자 tv토론회를 했습니다. 당시 첫날 지지율이 가장 많은 세사람인 문재인후보, 이정희후보, 그리고 지금 대통령인 박근혜후보가 나왔습니다. 토론회 내내 세사람은 전쟁이었습니다. 자신이 당선되어야 할 이유를 말하며 나머지 사람의 흠을 잡는 것을 보면서 그 토론회를 보는 사람들은 전쟁이라고 누구나 얘기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토론회가 끝나고 세사람이 손을 잡고 웃는 모습으로 국민들게 인사를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굉장히 세사람이 갈등없이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토론회를 본 사람들은 그 모습을 평화롭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를 가장한 전쟁중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상관없이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그것은 가장된 평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겉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늘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평화롭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겉은 평온해 보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이제 고3이다. 고3 되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가장된 평화에 속아서 평화롭지 못하면서도 평화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평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것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화평케 하는자로 살 수 있을까요?

둘째, 그것은 자기 부인을 할 때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2:2~8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일을 돌 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절과 3절을 보면 마음을 한 마음으로 하고, 다툼과 갈등이 없이 하려면 남을 나보다 높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습니까? 우리가 나는 소중하고 나는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은 알지만 그만큼 남을 존중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보다 남을 더 존중하고 높여 주라고 합니다. 그래야 갈등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나보다 남을 높게여기는 것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4절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인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자기부인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해 주고 있는것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쉽게말해 나는 아무것도 아닌존재라는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의 사람은 나는 하나님없이 바보같은 존재지 하고 바보라는 말을 넘깁니다. 그러면 다툼이 없어집니다. 누군가 내게 욕을 합니다. 기분나쁘지만 자기부인을 통해 나는 죄인이기에 욕 먹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 라고 인식할 때 갈등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왜 세상에 평화가 없습니까? 왜 시기와 질투,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까? 자기부인을 통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은 데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갈등과 다툼이 있는 곳에서 화평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화평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데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옆에 있는 사람과 화평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잘못을 해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구역예배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4주를 다루면서 나눌 때 한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용서 해야 평화가 오는것을알지만 절대로 용서가 안된답니다.  자기부인만 있으면 가능한 것 집사님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평화가 깨지더라도 자기부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은 화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힘들게 한 사람,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해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자기 부인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셋째, 날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복음앞에 서야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사역자로 알려진 조이스 마이어가 자신의 책 “마음 전쟁 끝내기”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남편과 여러 모로 다르다, 하지만 서로 목소리를 높여 말다툼하는 법이 거의 없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혼 초에 나는 남편의 나쁜 면만을 들추어냈다. ‘우린 생각이 너무 달라, 남편은 너무 고지식해, 옳고 그름만 따질 줄 알지 다정하지가 못해. 내 감정은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늘 이런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모두 오해였다. 이것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상으로 마음이 상한 나는 괜히 남편에게 시비를 걸어 집안을 시끄럽게 하곤 했다. 나는 거짓말에 속아 남편이 나를 모욕했다고 생각했다. 마귀의 간계에 놀아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엄마가, 아빠가, 친구가, 목사님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생각 속에 스스로 상처를 주면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단의 간계에 놀아났기 때문입니다.
 
‘저 인간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라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올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어떻게 구원받았다고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 무슨 말이에요? 죄와 허물로 망가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먼저 손을 내밀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화평의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화평한 자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도널드 맥컬로우(Donald W. McCullough)가 지은 “세상과 다른 마음”이라는 책에 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청년은 대학 4학년 때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것을 느끼면서 신학교를 가야할지 선교사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서 그는 시카고의 버스 기사로 일을 했습니다. 도심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여기가 예수님을 섬기는 곳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오후가 되면 한 그룹의 젊은이들이 그의 버스를 타고 도시의 번화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늘 버스에 올라타 요금함을 슬그머니 지나치고 승객들을 협박했습니다. 요금을 안 낼 테니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그들에게 정중하게 “손님들, 요금을 내야지요. 다른 분들은 다 내는데, 손님들만 안내면 불공평하잖아요. 요금 안내면 탈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요금을 내는 대신, 그를 버스에서 끌어내려 인사불성이 되도록 때리고 피를 철철 흘리며 반쯤 죽은 상태로 길거리에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경찰이 그 가해자들을 체포해 폭행죄를 선고했습니다. 한 달 후 재판 날, 그 버스 기사는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육신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복음의 진리를 확신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피고측 변호사들은 그들이 아직 고등학생이니 유죄판결을 받으면 졸업도 못하고 범죄 기록이 평생 따라 다닐 것이라며 선처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판사는 냉정했습니다. 판결을 내리기 전, 판사는 버스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면 행복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당신 기분이 더 좋아지시겠습니까? 이 불량배들에게 고통당한 사람으로서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은 그들 대신 제가 감옥에 들어가 형을 살고,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가 학교를 마치고 더 잘되는 것입니다.”

판사는 못 믿겠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정말 비현실적이고 어처구니가 없군요. 당신처럼 말하는, 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요. 그분이 하셨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이 평화를 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하시는 여러분 보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8복9. 마태복음 5장10절~11절 "고난을 믿음으로 직면합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성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기업의 사장님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성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가수들은 인기를 얻어 1위를 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선거에서 이긴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입시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공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거나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에서 성공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기준에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우리가 앞서 얘기했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앞서 얘기한 기준으로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거나 인정받는 것이 성공이라면 예수님은 실패자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실패자이고, 구약의 모세 역시 실패자입니다. 

예수님은 돈 한푼, 집 하나 없으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의 모세역시 왕궁에 쫒겨 나서 광야에서 어렵게 삶을 연장하고 있는 모습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의 인물들을 우리는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닮고 싶어하고, 바울을 닮고 싶어하고, 예수님을 닮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이 진짜 성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기준의 성공은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모세도 삶을 보면 만사 형통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연속 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과 모세의 삶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고난은 배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친 시점부터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기 까지 하십니다. 어마어마한 고난의 삶이 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고난이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살다보면 신앙생활과 부딛쳐 고난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로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의”라는 단어는 6절에 등장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에서 나온 “의”와 똑같은 단어 “디카이오쉬네”를 사용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 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상태”를 말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믿음의 삶을 살아 갈 때 박해가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여기에서 나온 “핍박”이란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온 “박해” 라는 단어와 동일한 “디오코”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인정받는 믿음을 가질 때 예수님이 당했던 “디오코” 즉,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 믿으면 고난과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믿어도 고난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5:1~5장을 보면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오는데, 믿는 사람은 고난을 직면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믿으면 고난은 끝나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어도 믿기 전과 똑같은 수많은 고난이 옵니다. 아니 예수님 믿으면 받지 않아도 될 고난까지 받게 됩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선배는 하늘이고, 부처님과 친구다. 이런 말들이 오가는 학교였습니다. 그만큼 선배들에 대해 깍듯했습니다. 만약 선배들에게 깍듯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엄청 두들겨 맞았습니다. 때리는 선배들에게 대항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살던 곳은 섬이라는 점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섬에서 선배들에게 대항하면 대항한 사람은 학교를 그만 둬야 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배는 1년 선배였습니다. 1년 선배중 저희 집 밑에 살던 “김규”라는 이름을 가진 형님이 있었습니다. 이 형님은 주일만 되면 저를 자기 집으로 불러놓고 자기는 계속 자는 것입니다. 그러다 예배시간이 되면 저는 그냥 교회를 갑니다. 교회를 다녀오면 그 다음날 학교에서 엄청 맞습니다. 자기 말을 안듣고 개겼다는 이유입니다. 그 다음주가 됩니다. 그러면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오는 고난 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부모님은 제가 주일에 교회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저희집이 어린이집을 운영하는데 농촌이기에 농사도 함께 지었습니다. 평일에 농사일을 할 수 없기에 저희집은 주말에 농사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황금같은 주일에 교회를 간다고 하니, 거기에 경운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저희집에 저 혼자 뿐인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제가 교회가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갈 때 마다 부모님이 갖은 욕을 해댑니다. 교회가 밥먹여 주냐? 그러면 저는 예 점심 줍니다. 그러다 더 욕먹고 막 그랬습니다. 

고1때 예수님을 만나고, 고2때 더 뜨겁게 성령을 체험한 후 저는 고3때 친구들과 늘 마시던 술을 끊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친구들이 저를 불러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친한 친구들과 멀어졌다. 그렇다고 이전에 친하지 않던 친구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나에게 당시 예수님 믿음으로 오는 또 다른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든 잘되야 한다면, 제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려고 주일에 교회 갔는데 월요일에 학교가서 선배들에게 그토록 맞았을까요? 나는 믿음 지키려고 발버둥 치는데 왜 집에서는 그렇게 욕을 먹었을까요? 예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려고 술을 끊었는데 왜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외로워 졌을까요? 도데체 왜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런 고난이 왔을까요?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저처럼 고난당하는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적 떨어지는데 교회 다닌다고 부모님들로 고난당하는 친구가 있을지 모르겠다.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 때문에 점점 학교친구들과 멀어진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고난받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왜 고난이 오는데 행복하다고 하는걸까요?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시고는 설교중에 “너희가 나 때문에 고난받으면 행복해질걸” 이러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말씀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행복이라니요? 그래서 묵상하고 또 묵상하다 제가 좋아하는 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이 고난이 왜 행복한지 이해하게 되었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인사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샬롬”입니다. 샬롬은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입니다. 사도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성경을 쓸 때 항상 빠지지 않았던 것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평화의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를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수많은 시간 동안 받았던 외세의 침공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과거 일제 강점기에 광복을 기다렸던 마음이 바로 평화를 기다리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외세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며 늘 샬롬을 꿈꿨던 것입니다. 

그 샬롬은 구약성경에 예수님이 오시면 완성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전부터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대왕의 헬라제국,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지배 받은 이스라엘은 오랜 기 간속에서도 평화를 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예수님만 오시면 이 모든 고난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에 구원자 예수님이 마태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침공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에서 해방 시켜줄줄 알았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버립니다. 700년을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믿은 예수님이 죽어버리니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그런데 3일만에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비록 육신은 여전히 로마의 압제가운데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육체적인 평화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삶의 문제보다 더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덩달아 마음의 평화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니 로마의 박해가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이 때 박해가 어느 정도인지 역사책에 보면,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에서 몇일을 굶은 동물과 싸우다 잡아 먹히게 됩니다. 기둥에 묶어두고 굶은 곰을 풀어 놓으면 곰이 가슴을 내리쳐 오장육부가 흘러내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화형당해 죽기도 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내면의 평화를 얻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이전보다 더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이 정의한 의로운 삶,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백성의 삶을 산 결과가 고난이고, 심지어 죽음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리어니한 것은 이들은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왠줄 아십니까? 그들은 고통과 고난을 넘어선 하나님나라의 참 평화를 경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이 평화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사람, 성령충만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충만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면 죽음을 두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선교지로 나가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이 평화를 경험했기에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과 죽음 너머에는 더 이상 외세의 압박을 받을 위험도 없고, 돈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고, 먹을 것, 취업, 결혼 걱정없는 완전한 삶이 보장 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초대교인들이 고난을 행복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 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고난이 행복이라고 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나라가 추상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고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죽으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이 초대교회의 영혼을 다스리고 있기에 고난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가능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고난이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바꾸려는 초대입니다. 고난이 있고 힘든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가운데 고난이 있을 때 여러분은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행복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절망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도 고난은 옵니다. 그 고난을 믿음으로 직면합시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중에 있습니까? 그 고난은 예수님 믿음으로 나의 죄인됨이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나의 죽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내지 않고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늘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그래서 “고난이 유익이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이 유익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고난받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임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 믿음으로 고난이 올 때 내가 하나님나라 백성이구나 기억하며 고난을 이겨냅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고난이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붙잡읍시다. 그때 완전한 샬롬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회복하실 것입니다.